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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이 Aug 24. 2022

충분히 짙다, 흩어지기엔




그 감정에

색을 입히자면


나는 굳이 짙은 색을 택해


그 위에 척척 펴바를 것 같다고


잠시 생각했다.




나는 가볍고 싶어.

심각해지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는 걸.


그렇게 말하면서도


나는 짙은 색을 고르고 마리라.




짙은 색을 골라 칠한다


짙은 색끼리 엉키니

무슨 색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무거운 색이 되고 만다



태초의 색이 무슨 색이었는지


쉽사리 보이지 않는다



짙고 짙어 가늠하기 힘들다



수채화처럼

투명하게 비치는

위에 덧발라도

겹겹이 색이 보이는 그런 그림을 생각했지만


나는 기어코

짙은 색을 칠한다.




무슨 색들을 칠했는지

나는 끝내 구분하지 못한다.



색들을 가려내지 못한다.



그저 짙다.



나는 기억을 한껏 풀어헤쳐


편린을 흩뜨린다.



자잘한 편린들이


짙은 색 속에


고요히 침식되지 못하고


기어이 흩어지고 만다.


나는 그저 흩어지게 둔다.



흩뜨린다는 말은

흩어지게 하다라는 의미의 타동사예요, 타-동-사아-.


나는 거품같은 말을 허공에 내뱉고


다시 짙은 색을 골라 칠한다.



어떤 감정이든 다 칠해버리겠어, 그런 심산으로.




그러나 아-무것도 남지 않기엔

이미 충분히 짙다



모든 편린이

모든 색이 흩어지기엔



이미 너무 짙다.






짙어서 흩어지지 않는 건지

흩어지지 않아 짙다고 생각하는건지


나는 알 수 없다.




혼란을 색으로 표현한다면


어떤 색일까,


잠시 생각한다.




내가 떠올리는 너에 대한 모든 생각들에

색을 입힌다면



종국적으로 그건 무슨 색으로 표현될까



색, 이라고 명명할 수 있긴 할까.



나는 칠한다,

덕지덕지.


또 고른다


역시 짙은 색이다.



칠하고 흩뜨리고

고르고 칠하고 흩뜨리고


정신을 차려보면



여전히 너무 짙고


진하고



짙다.



이미 너무 충분히 짙다.




충-분-히.



너는 아니,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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