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사용라이프, 그냥 '라이프'

내 몸을 사용하기 - 살아가기

by 어찌



더 이상 물건에 잡아먹히지 말자고 생각했다. 무기력하게 누워만 있는 대신, 물건을 하나씩 사용해 가자 자연스럽게 몸도 일으키게 되었다.


사용라이프는 어쩌면 삶, 그냥 '라이프' 자체인지도 모르겠다.








물건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결국 몸을 움직여야 한다.

나 같은 게으름뱅이에게 그 어떤 물건보다 내 몸을 사용하는 거야말로 가장 애써야 할 일이긴 하지만. 어쨌든, 내게 이미 있는 걸 잘 사용하기로 했으니까 꾸물꾸물 움직여야만 한다.



시간을 굳이 내어 책상에 앉아 노트를 펼친다. 디지털 화면에 손가락으로 터치하는 대신, 굳이 만만한 모나미 펜을 손에 쥐어 손목부터 손가락까지 적당한 힘을 준다. 펜 끝에서 잉크가 종이의 섬유로 퍼져 나간다. 자음과 모음이 써지고, 단어가, 문장이 써진다.

일기의 문장을 이어 나가기 위해, 내 몸을 바지런히 움직였던 하루를 복기한다.


애써 몸을 일으켜 냉장고에서 토마토를 꺼내 대충 썰어 프라이 팬에 올려 굽는 동안, 계란 2개를 꺼내 소금 한 꼬집을 넣고 휘휘 젓는다. 그걸 토마토 위에 붙고, 그 위에 지난주에 사 두었던 모차렐라 치즈를 올린 뒤, 마지막으로 내 게으름을 보완해 줄 시판용 스리라차 소스까지 얹으면 근사한 브런치가 완성된다.


위험천만하다는 집 밖에 나가기 위해 내가 가장 편하게 느껴지는 밴딩 바지에, 하얀 카라 티셔츠를 입는다. 앉아도 마구 다리를 휘저어도 전혀 결리지 않는다. 오늘 하루 움직일 나의 몸을 거울을 보며 확인한다. 가뿐하게 움직일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가뿐한 기분을 더욱 새롭게 하기 위해 목 뒤쪽으로, 머리 위로 향수를 두 번 뿌린다. 식- 소리와 함께 작디작은 향수의 입자가 내 몸을 감싸는 게 느껴진다. 동백꽃 향이 적당히 달고, 적당히 가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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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을 마구잡이로 들이기만 하고 사용하지 않고 쌓아만 두던 때가 있었다. 공간을 가득 채운 맥시멀의 삶. 물건에 내 몸이 짓눌려 꿈쩍도 하지 못 했다.


더 이상 물건에 잡아먹히지 말자고 생각했다. 무기력하게 누워만 있는 대신, 물건을 하나씩 사용해 가자 자연스럽게 몸도 일으키게 되었다. 덕분에 방구석에 누워만 있으며 내 몸의 사용을 포기하는 대신에, 지금 움직일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꾸물거리려 애쓰고 있다.

남이 내 몸을 마구잡이로 사용하게 내버려 두지 말고, 손가락 까딱 정라도 좋으니 주도권을 가지고 몸을 움직이자고 다짐하면서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사용되지 않은 채 벽에 묵직이 처져있는 걸레 대신, 바싹한 햇빛 냄새가 나는 마른 수건이 된 기분이랄까. (물론, 여전히 그 다짐은 자주 흔들리고 때로 축 처진 걸레가 되기도 하지만, 또다시 마른 수건이 되는 날도 으니까.)






사용라이프는 어쩌면 삶, 그냥 '라이프' 자체인지도 모르겠다.


사용라이프를 마음먹으며 떠올린 중간 이야기를 생각한다. 내가 궁금해하던 중간 이야기는 거창한 게 아니었던 거 아닐까. 그건 그냥 지금 움직이고, 보고 맛보고 맡는 감각을 누리는, 진부하기 짝이 없는 살아가는 모습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삶이란 대부분 그런 진부하고 어중간한 시간이라 믿는다. 그래서 그 어중간한 시간에 우리는 물건도, 몸도, 시간도 충분히 사용할 수 있는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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