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집 : 시간을 낭비하는 중입니다.

논다는 것은 시간을 충분히 낭비해야 하는 일

by 어찌


퇴사 후에 집과 도시를 벗어나지 않는 나를 보며, 친구들은 여행은 왜 안 가느냐고 물었다.


( 나 ) 봐, 지금 네가 회사에 있다고 생각해 봐.

(친구) 악몽이네.

( 나 ) 악몽이지. 어쨌든 회사야.

(친구) 응.

( 나 ) 출근해서 오전이 엄청 바쁘게 가고, 점심을 먹고, 직장인이 가장 졸리다는 오후 2~3시가 됐어.

(친구) 응. 응.

( 나 ) 지금 너는 어디에 가장 가고 싶을 것 같아?

(친구) 당연히 집이지.

( 나 ) 그치...?

(친구) ....... 아.






대학생이면 당연히 배낭여행은 다녀와야지.

졸업했으면 당연히 회사에 취업해야지.

결혼했으면 내 집 마련은 당연히 해야지.


‘~해야지’ 시리즈가 만연한 사회라지만, 백수 시리즈도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퇴사했다고? 떠나야지.” “여행 가야지.” 특히, “아니, 퇴사했다고? 그럼 해외여행 가야지!”


어쩐지 노는 시간마저도 생산적으로 보내야 한다는 ‘생산중독’이 지독한 사회다. 그리고 그 지독함이 당연해서 더 지독하다. 노는 순간, 휴식의 시간에서조차 하나라도 얻어내야 한다는 결연한 비장미까지 느껴진다. “인생의 어떤 순간도 낭비해서는 안 돼!”

낭비할 수 없는 시간이라니. 그런 시간을 ‘업무 중’이라고 부르지 않나요. 회식 시간을 휴식 시간이라고 하는 사람은 듯이 말이다.





백수가 된 지 얼마 안 되고 이런 질문들을 받았을 때는 많이 흔들렸다. 남들이 말하는 대로 해외에 가서 뭔가 근사한 깨달음을 얻어와야 할 것만 같았다. 어떻게 된 백수인데, 이렇게 백수같이(?) 시간을 보내도 되나?

실행하지 못한 건 단순히 내 미루는 습관 때문이었다. ‘내일 알아보지 뭐...’ 하다가 한 달, 두 달, 세 달이 지나갔다.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나자, 의도치 않게 나름 백수로서 조금은 단단해져 버렸다.

“해외여행 안 가? 가까운 곳이라도.”라는 의문에는 “응, 별로?”하고 그냥 대답하면 그만인 것이었다. 어쩌면 ‘~해야지’ 시리즈는 ‘밥 먹었어?’와 같이 별 의미 없는 이어가기용 대사일 뿐이었는데, 혼자 그것에 흔들려 왔는지도 모른다.



요즘의 난 즐거움과 조급함을 번갈아 느끼고, 시간을 밀도감 있게도 느슨하게도 보낸다. 아직도 자주 흔들린다는 말이다. 그래도 조금은 중심을 잡는 법을 터득하고 있는데, ‘이렇게 시간이 많은데 ~해야 하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 때면 회사에 다니면서 간절히 바라던 게 뭐였는지 떠올리는 것이다.

사무실에 앉아 있던 순간 바라던 것. 9시 출근하자마자, 점심을 먹으며, 상사에게 한 소리를 듣는 모든 순간에 늘 떠오르던 단 하나의 생각.

‘아, 집에 가고 싶다.’

집에서 편안한 옷을 입고 하고 싶은 걸, 하고 싶은 시간에, 하고 싶은 만큼만 하면서 지내고 싶었다. 그 안에 인생의 깨달음을 얻는 비장미 넘치는 해외여행 같은 건 없었다.






생각해 보면, 애초에 '논다는 것'은 시간을 충분히 낭비해야 하는 일 아닐까. 뭘 하고 놀 때 가장 즐거운지 충분히 시간을 들여 생각해 볼 수 있고, 그걸 내가 가진 에너지만큼만 느슨하게 보낼 수도 있어야 하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백수의 본분에 맞게,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뻔뻔하게 놀며 지내자. 집에서.

역시 나는 여전히 집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