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진 걸 잘 쓰려면, 못하는 건 넘겨버리자
귀찮음을 이겨낼 수 있는 건 가끔일 뿐이다. 식사는 매일 해내야 하는 것이고.
대기업도 자신이 못하는 건 외주를 준다. 부품도 구매해서 조립해서 만들고 대기업의 상표를 붙이지 않나.
그 똑똑한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도 모든 걸 다 하진 못하는데, 나 같은 개인도 위탁 좀 해서 요리하면 어떤가.
그러니 재료 손질부터 각종 양념장과 소스를 만드는 것까지 모두 직접 손으로 해야지만 '집밥 요리'가 된다는 욕심을 버려도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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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 사진과 함께 올라온 질문을 보고 웃음이 났다.
- 유통기한 지났는데, 이 밀가루 먹어도 될까? 냄새나 겉보기에는 멀쩡한데.
평소 나도 종종 들었던 의문이라 답변을 보기 위해 스크롤을 내렸다. 그리고 발견한 명언 한 줄.
- 가루 이즈 네버 다이. (가루 is never die)
가루는 결코 죽지 않는다는 엄숙한 답에 웃기면서도 웅장한 기분마저 들었다. (물론 실제로 유통기한이 많이 지난 건 버려야 한다.) 이 질문과 답에 즐거움을 얻은 건 아마 너무나 공감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냉장고 정리를 하다 보면 누가 봐도 당장 버려야 할 곰팡이 핀 야채와 과일부터, 먹어도 될 것 같은 가루까지 다양하다. 대체로 인간의 가공이 많이 들어간 식재료일수록 멀쩡해 보이고, 자연 그대로에 가까운 식품일수록 악취와 끈적한 액체를 내뿜었다. 덕분에 자연 식료품은 금방 발견하고 버릴 수 있었지만, 가공 제품은 냄새도 액체도 나지 않아 유통기한 (이제는 소비기한)이 지난 정도가 며칠부터 몇 개월, 심지어 몇 년 전 것까지 발견되기도 했다.
그만큼 나는 식재료를 사두고, 정작 요리할 때가 되어서는 귀찮아서 미루다가 먼 훗날 발견하여 버리기를 반복했다. 음식은 옷처럼 뒤늦게 발견한다고 먹을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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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재료의 구입은 '10분 만에 만드는 초간단 자취 요리', '불을 사용하지 마세요.', '딱 3가지 재료만 가져오세요.' 따위의 1분 영상에서 시작되곤 했다.
'간장, 다진 마늘, 멸치액... 다 있고. 굴소스, 고춧가루 있고. 대패삼겹살은 필수는 아니라고? 아, 팽이버섯 식감이 핵심이구나. 팽이버섯만 사면 되겠네!'
그렇게 사 온 팽이버섯은 열흘 뒤, 처참한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탱탱했던 줄기는 능청거리고, 밑동은 시꺼메져 늪지대 곰팡이의 냄새가 났다.
팽이버섯뿐이 아니다. 지금껏 맡아본 최악의 상한 냄새는 순두부였다. 순두부가 상하면 상한 음식이 한 번 더 상한 것 같은, 말하자면 쓰레기 상한 냄새가 난다는 걸 처음 알게 된 때도 있었다.
그런 식으로 귀찮아서 요리를 미루다가 상한 음식을 버리고 나면, 이제 당분간은 꼭 집에 있는 것만으로 먹자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집에 있는 식재료를 활용한 음식을 만들기 위해 다시 요리 동영상을 찾아보았다. 이상하게 꼭 재료 한두 개가 부족했다. 그리고 다시 위와 같은 상황이 한동안 반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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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라이프를 살자고 마음먹었는데, 언제까지 아깝게 식재료를 사고 버리고를 반복할 수는 없다. 왜 자꾸 이런 일이 반복되는지 생각해 보았다.
나는 외식을 자주 하지도 않고, 배달 음식은 거의 시켜 먹지 않는 편이다. 집에서 먹을 수 있는 날은 꼬박꼬박 집에서 먹는다. 다만, 이상하게 늘 해 먹는 것만 해 먹고 있었다.
평소 뚝딱뚝딱 곧 잘해 먹던 요리는 된장소스에 각종 야채와 밥과 두부를 넣은 된장술국이라던가 오이와 참치에 김과 스리라차 소스를 넣어 비벼 먹는 식이고... 마음먹고 재료까지 다 사두고도 미루던 요리는... 각종 야채에 소스를 만들어 끓이는 짜글이라든가 뚝배기 전골 같은 거네.
몇 가지를 더 떠올리다가 깨달았다.
아, 나 소스를 직접 만들어야 하는 요리는 안 해 먹는구나.
사실 아주 어려운 게 아니고서야 소스를 만드는 건 간단하다. 간장, 고추장, 굴소스, 식초, 다진 마늘, 돈가스소스, 액젓, 설탕, 올리고당, 고춧가루 등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조금씩 덜어 비율대로 섞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쉬운 것과 별개로, 나는 그게 너무나 귀찮았다.
- 어디 보자, 간장 2, 굴소스 1, 설탕 1... 아 귀찮다. 그냥 볶음밥이나 해 먹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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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는 시판용 양념장과 소스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저당 신드롬에 힘입어 양념장도 저당, 저칼로리로도 많이 나오고 맛도 좋다. 글로벌화에 맞추어 밥심의 민족답게 세계의 온갖 양념장을 쉽게 구할 수도 있어 일식, 동남아식 요리도 어렵지 않다. (물론 대충 흉내만 내는 정도지만)
대기업의 똑똑한 석박사와 전문가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배합의 양념이므로, 웬만해서는 실패하지 않는다.
시판용 양념장과 소스의 힘으로 요즘은 냉장고의 식재료를 척척 털어가고 있다.
일반 된장소스가 대신 강된장소스를 사서 된장국에 된장 볶음밥까지 곧 잘해 먹는다. 양파, 버섯, 두부만 넣어 물 없이 볶아주면 밥 한 공기 뚝딱이다. 팽이버섯은 더 이상 버려지지 않는다. 스파게티 소스도 아주 다양하게 나와서, 입맛에 맞는 토마토 스파게티 소스에 순두부와 계란을 넣어 전자레인지에 돌려 만든 그라탱은 그렇게 술술 넘어갈 수가 없다. 바삭한 게 당기는 날에는 토르티야(또띠아)에 그날 먹고 싶은 소스를 바르고 에어프라이어에 굽는다.
내가 어떤 식재료를 잘 활용하고 힘을 덜 들이며 요리를 할 수 있는지 알고 나자, 냉장고도 잘 털어내고 음식물 쓰레기도 훨씬 덜 나오게 되었다.
내가 이미 가지고 있는 걸 잘 사용하기 위해서는, 내게 어려운 부분은 남에게 넘길줄도 알아야 하는 것이었다.
더는 그 이상한 악취와 곰팡이를 통해 생명의 신비를 접하지 않아도 되는 건 덤이고, 식재료를 사용하지 않고 버렸다는 자책감에서 벗어나는 건 이자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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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양념장을 직접 만드는 것보다 건강에는 안 좋을지도 모른다. 아주 조금의 노력과 시간만 들이면 맛도 훨씬 좋아질지도 모른다. 1분만 더 투자하면 된다. 아주 약간의 귀찮음을 이겨내기만 한다면 당당한 '집밥 요리'를 할 수 있는 셈이다.
하지만, 귀찮음을 이겨낼 수 있는 건 가끔일 뿐이다. 식사는 매일 해내야 하는 것이고.
대기업도 자신이 못하는 건 외주를 준다. 부품도 구매해서 조립해서 만들고 대기업의 상표를 붙이지 않나.
그 똑똑한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도 모든 걸 다 하진 못하는데, 나 같은 개인도 위탁(?) 좀 해서 요리하면 어떤가.
그러니 재료 손질부터 각종 양념장과 소스를 만드는 것까지 모두 직접 손으로 해야지만 '집밥 요리'가 된다는 욕심을 버려도 되지 않을까. 사람마다 누군가에게는 손쉬운 일이, 세상 귀찮게 느껴지는 영역이 있으니까. 견디지 못하는 귀찮음을 굳이 이겨내려고 하기보다는, 적당히 타협하는 게 다양한 집밥을 해 먹게 되는 방법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