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의 아이들은 어떤 노래를 품고 살아야 할까
아이라는 단어 속에
유강희
아이라는 단어 속에
아이는 없다
늘 뛰쳐나가려는
푸른 발굽도 없고
파닥파닥 솟구치려는
힘센 날갯짓도 없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하이얀 웃음도
천둥마저 멎게 하는
끔찍한 울음조차 없다
아이라는 단어 속엔
아무것도 없다
아,이, 두 글자를
아무리 들여다본들
아무 대답도 들을 수 없고
옆에서 누가 하품을 해도
쉬운 수수께끼조차 모른다
종이가 말하고
검은 글자가 받아쓴다
-그러니 당장 아이들 속으로!
살아 있는, 숨 쉬는
너울거리는, 흐르는
도약하는, 폭발하는
아이의 진짜 뛰는 심장을
당신 손으로 직접 움켜쥘 것
그 느낌에 온 우주를 걸 것
그 고동과 하나가 될 것
『창비어린이』동시 특집호 제목은 “동시-내일의 노래”이다. 21명 시인이 “한 마디라도 더 내일에 가깝게, 원하는 실험은 마음껏, 어린이가 장차 자라나는 방향 쪽으로 달려가서 시를 써”달라는 제안에 42편의 동시로 답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내일에 가까운 동시를 발견하지 못했다. ‘내일의 노래’가 아닌 ‘오늘의 노래’라고 해도 전혀 어색한 점이 없어 보인다. 왜일까.
시인들의 동시 건축이 견고하고 정교해지는 것에 반해 그곳에 어떤 아이들이 뛰어놀 수 있을지 그려지지 않는다. 내일의 아이를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내일의 노래를 만나지 못했다고 생각된다. “아이들은 난해해지고 동심은 발견되지 못하는데 동시가 자꾸만 멀리 가자고 하는 것 같아 어지럽다.”는 김재복의 시선과 함께 나에게 다가온 질문은 이것이다. 내일의 아이를 발견하는 일은 무엇으로 가능한 것인가. 여기서 내일의 아이는 미래의 아이가 아니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아이를 내일의 아이로 생각하는 건 지금의 아이를 외면하는 것과 같다. 나는 지금의 아이들이 시간이 흐른 뒤 마주하게 될 내면의 아이를 내일의 아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러니 내일의 노래는 내일의 아이를 위한 노래이지만, 그 노래는 정확하게 지금의 아이들에게 전달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떤 노래어야 할까. 아이들은 어떤 노래를 품고 살아야 할까.
“우리에게 닥치는 슬픔이라든지, 힘듦, 상처, 절망…… 모두 지극히 사랑하기를 마지않아야 할 것이다.”라는 이상교 시인의 말에서 실마리를 찾아본다. 우리에겐 어쩌면, 내일의 아이를 위해 슬픔, 힘듦, 상처, 절망을 지극히 사랑하기를 마지않는 동시가 필요할 수 있다. 그들이 마주한, 혹은 마주할 세상의 절망과 허무를 깊이 경험하게 하는 동시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김개미가 “결핍된 현실과 마주하는 여자 어린이의 내면을 인상적으로 그려 냈”고, 송현섭이 “‘추의 미학’으로 감추어진 현실이나 들추고 싶지 않은 세계의 진실을 드러”냄으로써 결핍과 절망의 동시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절망 속에서 다시 절망하는 삶을 사랑하는 이야기가 필요하지는 않을까. 그것이 우리 동시의 빈자리이며, 내일의 아이에게 필요한 말은 아닐까. 왜냐하면 인생은 언제나 희망의 노래가 아니니까. 절망의 노래가 희망이 되는 순간이 있으니까. 그러나 동시는 아직 “천둥마저 멎게 하는 끔찍한 울음”을 담고 있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러니 당장 아이들 속으로!”라는 구호는 ‘내일의 아이’를 위한 것이다. 무엇을 어떻게 노래할 것인가를 고민하기 전에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아도 좋을 것이다. 내일의 아이를 위해 우리는 무엇을 노래해야 할까. 내일의 노래는 내일의 아이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