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여러 사람 앞에서 말하는 것을 두려워 하는 편입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 설 일이 생기면 대본을 씁니다. 그리고 대본을 외워서 발표합니다. 연기하는 배우에 가깝습니다. 대본없이 무대에 서면 어떤 말도 하지 못하거나, 어떤 말을 해도 다 헛소리가 되어버립니다. 너무 긴장이 되어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거든요.
기억을 더듬어보면 '도전! 골든벨'이라는 프로그램 오디션을 본 날이 무대 공포증 시작인 것 같습니다. 오디션 현장에는 방송용 카메라 한 대가 저를 비추고, 다른 친구들은 관객석에 앉아 있었습니다. 담임 선생님 관련된 에피소드를 이야기 해달라고 했습니다. 준비된 질문과 준비된 대답이었는데, 막상 말을 시작하니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습니다. 준비된 멘트이니 어떻게든 차례를 끝냈습니다.
말이 끝났을 때, 무대에는 얼굴이 빨갛게 터져버릴 것 같은 제가 있었고, 그런 저를 놀리듯 웃는 친구들이 있었고, 안쓰러워 하는 선생님이 있었고, 무표정의 PD가 있었습니다. 그 때부터 저는 무대에 올라가면 저를 비웃는 시선이 느껴집니다. 사실 그 전부터 무대 공포증이 있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있었던 증상인데 그 날 알게 된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친구들을 탓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대학교에서 나름 발표도 많이 하고, 교사로 근무하면서 여러 사람 앞에서 말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얼굴은 빨개지고 숨은 턱 끝까지 막힙니다. 두려움이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간단한 발표라도 며칠 끙끙대며 준비하고 연습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덜덜이"도 저와 비슷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친구들 앞에서는 "목구멍에 거미줄을 친 듯" 말 한마디 하지 못합니다. 덜덜이가 그 거미줄을 뚫고 목소리를 낸 것은 교실로 날아온 벌, "붕붕이"를 살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선생님이 붕붕이에게 살충제를 뿌리려고 하자 덜덜이는 벌을 죽이지 말라며 소리를 칩니다.
덜덜이의 본명은 "벌이"입니다. 양봉 하시는 외할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입니다. 벌이는 벌을 가장 좋아하는 아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벌이는 붕붕이를 위해 두려움을 뛰어넘는 용기를 낼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두려워도 좋아하는 건 지켜야 하는 법이니까요.
덜덜이, 그러니까 벌이가 두려움을 뚫고 목소리를 낸 장면을 묘사하는 문장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말하기 전의 떨림은 자동차에 시동 거는 거랑 비슷했다. 아빠가 차 수리를 할 때 옆에서 본 적이 많다. 멋진 스포츠카는 시동을 걸면 엔진이 어마어마하게 큰 소리를 내며 깨어난다. 나는 고물차 덜덜이가 아니었다. 나의 부르르 떨리는 심장 박동은 고속도로를 달리기 위한 스포츠카의 시동일 뿐이었다.(88쪽)
다른 사람 앞에서 말하는 일을 두려워하는 저에게 필요한 문장이었기 때문에 마음에 훅 들어왔던 것 같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개인적인 이유가 아니더라도 이 문장은 이 동화의 품격을 보증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동화는 어린이가 겪는 어려움을 희망의 관점에서 재해석하기 마련이니까요. 그래서 두려움을 오히려 설렘의 심장 박동으로 전환시켜 버리기도 하니까요. 시선의 전환은 현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언어의 습득을 의미합니다. 두려움에 다른 이름을 붙일 수 있을 때 그것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언어는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입니다. 과장하자면,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은 우리가 가진 언어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문학은 그 ‘언어’를 재료로 조직된 구성품입니다. 많은 이야기를 간직한 어린이는 세상을 다각도로 인식할 수 있습니다. 크고 작은 어려움에 부딪힐 때 그것을 긍정적으로 재해석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어린이를 위한 새로운 이야기가 지속적으로 공급되어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두려움에 설렘이라는 새 이름을 달아 준 이 이야기처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