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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령 Jan 25. 2017

편하지만 불편한 츄리닝

츄리닝의 탄생과 변화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청년들의 수가 해가 지나갈수록 늘어가고 있다. '공시생'이라고 불리는 이들을 떠올리면 노량진의 츄리닝족이 떠오른다. 중요한 공부를 할 때는 츄리닝을 주로 입게 된다. 옷으로 집중이 분산되는 것을 방지하고, 공부를 할 때 불편한 옷이 주는 몸의 피로를 줄이기 위해서다. 그래서 공시생들만 아니라 수능을 준비하는 학생들은 물론이고, 취업 공부를 하는 사람들도 츄리닝을 주로 입는다.

 

 재수를 할 때, 또래 친구들은 대학에 입학해서 멋내기 바쁜데 츄리닝을 입은 스스로의 모습에 주눅이 들곤 했다. 츄리닝이 단어 그대로 '추리'하게 느껴졌다. 츄리닝의 어원이 '추리하다'의 '추리'와 영어에서 상태를 나타낼 때 쓰이는 어미 '~ing'를 합쳐놓은 것이 아닐까라는 의심도 든다. 츄리닝의 어원에 대해서는 것은 고정된 하나의 학술적 의견이 없다. 'Training wear'을 츄레이닝이라고 발음하다가 그것이 츄리닝이 되었다라는 설부터, 일본에서 넘어온 어투라는 이야기까지 다양한 소문만 있다.

 

 츄리닝의 표준어인 '추리닝'의 사전적 정의는 '운동이나 야외 활동을 할 때 편하게 입는 옷'이다. 이를 보면 츄리닝은 운동복에서 유래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운동량이 부족한 현대인 생활을 보면 츄리닝은 운동복으로 보다는 집 안에서 편하게 입는 옷으로 더 많이 입혀지는 것 같다. 처음에 츄리닝이 한국에 들어왔을 때는 운동을 목적으로 들어왔을 수는 있지만 이제는 편하면서 대충입기 좋은 옷으로 더 많이 사용되는 것 같다.


 츄리닝이 처음 서양에서 등장했을 때도 전문 운동복의 느낌이 강했다. 르꼬끄 홈페이지에는 1930년대에 자전거 경기 선수들의 전문 운동복으로 츄리닝(sweat suit)를 최초로 만들었다고 설명되어있다. 최초의 츄리닝은 회색 저지로 만들어졌는데 바로 이것이 한국에서 흔히 '회츄'라고 부르는 회색 츄리닝이다.

르꼬꾸 홈페이지에 1939년 sweat suit를 발명했다고 소개되어 있다. (c) Lecoq sportif 홈페이지


 1960년도에 들어서서 자전거 선수 뿐만 아니라 다른 종목의 운동 선수들도 츄리닝을 입었다. 이들은 본격적인 훈련을 하기 전에 준비 운동을 할 때나 훈련 후에 편히 입는 옷으로 츄리닝을 입었다. 이때부터 츄리닝은 특정 종목을 위한 전문 의복의 의미를 벗어냈다. 1970년, 80년대에는 일반인들도 조깅처럼 가벼운 운동을 하거나 에어로빅이나 어반 댄스같은 춤을 출 때 츄리닝을 즐겨입었다. 여전히 츄리닝은 운동복으로 사용되지만 운동 선수들과 함께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입혀졌다.


 츄리닝이 운동복이면서 동시에 일상복이자 패션 아이콘이 된 것은 1990년대부터였다. 운동선수들은 운동할 때뿐만이 아니라 집에서 쉴 때와 가벼운 외출을 할 때에도 츄리닝을 즐겨 입었다. 그래도 여전히 츄리닝은 주로 스포츠 전문 가게에서 사야했고, 일반 옷가게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렇지만 스포츠 가게를 열심히 들리면서 츄리닝을 구매해서 패션의 아이콘으로 이용한 집단이 있었다. 바로 래퍼들이었다. 당시 힙합 래퍼들은 음악 정체성을 옷으로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었고, 츄리닝에서 그 가능성을 봤다. 그들은 이전에 많이 입혔던 단순한 회색, 검정색의 무채색의 츄리닝 말고도 빨간색, 파란색 등 눈에 띄는 채도의 옷과 새로운 디테일을 가지는 츄리닝을 시도했다. 이들 중 래퍼 제이지(Jay-Z)는 로카웨어(Rocawear)이라는 츄리닝 전문 의류 브랜드를 만들어서 래퍼들과 일반인들을 위한 츄리닝을 팔면서 성공하기도 했다.

Rocawear를 입고 있는 래퍼Jay Z. 그는 한국에서는 비욘세의 남편으로 더 많이 알려져있다.(c) 핀터레스트


 2000년대 초에는 츄리닝은 유행의 중심에 있었다. 각종 잡지에서 파파라치 사진들을 실었고, 이 때문에 할리우드 스타들의 일상이 많이 노출됐다. 카메라 앞에서 화려했던 연예인들이 일상에서 츄리닝을 입은 모습은 일반인들이 츄리닝을 사도록 부추겼다. 여기에 영화나 드라마에서 배우들이 츄리닝을 입은 장면을 많이 보여주는 것도 한 몫을 했다. 이 흐름을 타서 운동복과 관계가 없는 유명 패션 디자이너들이 츄리닝 디자인에 합류했다. 올림픽 선수 단체복으로 랄프 로렌과 스텔라 맥카트니 등이 직접 츄리닝을 디자인 하기도 했다. 당시 츄리닝은 일종의 잇 아이템이었다.

할리우드 스타 패리스 힐튼은 츄리닝을 애용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c) http://blog.daum.net/mystyleroom



 급격하게 치솟았던 츄리닝의 인기는 2000년대 후반에 빠르게 식었다. 츄리닝을 입는 것은 더 이상 트렌드를 잘 따라간다는 의미를 전달하지 못했다. 그래도 그 이후 츄리닝은 집에서 편하게 입는 옷이라는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것으로 남게됐다. 오랜 시간을 거쳐서 츄리닝은 운동 경기에서 탄생해 우리 집 옷장으로 들어왔다. 거실에서 츄리닝을 입고 라면을 먹으면서 드라마를 보는 것은 당연한 우리 일상 장면이 됐다. 


 한국에서는 서양과 다르게 츄리닝이 주는 이미지가 홈웨어에서 공부복으로 더 많이 강화되는 것 같다. 노량진 고시생들은 츄리닝이 그런 이미지를 가지는데 가장 크게 기여하지 않았나 한다. 그런데 그들은 그 편한 츄리닝을 입고도 마음 편히 있지 못한다. 그들은 시험에 대한 초조함, 가족과 미래에 대한 걱정, 그리고 공부 때문에 늦출 수 없는 긴장감을 항상 품고 다닌다. 새벽에 학원으로 나서고 늦은 밤까지 공부하다가 지친 몸으로 집으로 돌아온다. 공부하기도 힘든데 여러 가지 걱정들이 계속 나이와 함께 많아진다. 그런 이들의 무릎 나온 츄리닝은 편해 보이지 않고, 오히려 걱정과 피로함을 보여준다. 


 공시생 수가 증가하는 현상은 한국의 미래에 대한 불확신 및 불신과 무관하지 않다.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태풍에 대비하기 위해서 모두가 츄리닝이라는 똑같은 방패복을 입고 있다. 그들이 입은 츄리닝을 보면 한국의 불편한 현실을 보는 것 같아서 마음이 무겁다. 가장 다양한 옷을 입어야 할 나이의 사람들이 같은 옷을 입고 자기만의 고유한 색을 잃어가는 것 같다. 어쩔 수 없는 그 분위기 속에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공시생 이퀄 무릎 나온 츄리닝 그거 다 미디어가 만들어낸 이미지다. 여기 옷 잘 입는 애들 많다."



 드라마 <혼술남녀>에서 한 공시생이 멋있는 디자인을 가진 츄리닝도 있음을 어필하면서 하는 대사이다. 이 공시생이 자기만의 멋스러운 츄리닝을 입음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듯이 많은 공시생들이 걱정 속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는 방법을 작게나마 가지고 있었으면 한다.

"공시생 이퀄 무릎 나온 츄리닝 그거 다 미디어가 만들어낸 이미지다. 여기 옷 잘 입는 애들 많다."  (c) tvN, 혼술남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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