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

책기록

by 물결


그랬다. 나는 흘러간 유행가의 제목처럼 참 바보처럼 살았던 것이었다. 그런 깨달음이 언제부터인가 아주 조금씩, 아치 실금이 간 항아리에서 물이 새듯 그렇게 조금씩 내 마음을 적시기 시작했을 것이었다. 항아리의 균열은 점점 더 커지고, 물을 걷잡을 수 없이 새들어오고, 마침내 마음자리에 홍수가 나버려서 이 아침 절박한 부르짓음을 토해내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이렇게. "그래. 이렇게 살아서는 안 돼! 내 인생에 나의 온 생애를 다 걸어야 해. 꼭 그래야만 해!" 홍수가 나버리도록 마음자리가 불편할 때까지 나를 참게 한 힘은 무엇이었을까. 인생을 방기하고 있다는 자괴감에 시달리면서까지 무위한 삶을 견디게 한 힘은 무엇이었을까. p.18.


나에게 글을 적는 이유와 읽는 이유를 지금 묻는다면 타오르는 그을음이라 말해야 해요. 나의 그을음. 나의 평생을 따라오는 그림자. 나의 어두컴컴한 먹구름. 마른 잎사귀를 촉촉하게 적시는 먹구름을 닮았어요. 글을 적는 이유는 잿빛이나 회색빛에 가까워요. 저는 모든 것이 잠잠해지고 침착해지는 저녁에 글이 타오르는 시간을 좋아해요. 우리네 삶은 태어난 삶이 생을 다 할 때까지 소멸해야 하기 때문이죠. 어느 순간은 한없이 반짝여서 꽃갈피처럼 포착해야만 해요. 어떤 순간들은 눈물이 또르르 나와서 너무나 귀하고, 어떤 순간들은 포옹해야할만큼 포로롱 가까워져야 해요. 어떤 순간들은 불행하고 불쌍하고 치졸하고, 어떤 순간들은 풍선이 되어 하늘로 두둥실 떠오르는 사랑스런 마음이에요.


희미한 선. 김장우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우선 희미한 선부터 말해야 할 것이다. 이 말을 자칫 김장우라는 인물의 두렷하지 못한 성격이나 별다른 특징 없는 외모를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하면 곤란하다. 오히려 김장우의 사람됨은 그 반대쪽에 있다. 김장우는 의외로 강한 성격이며, 군중 속에 섞여 있어도 곧 눈에 뜨일 만큼 호리호리하고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그의 선량한 미소와 눈빛을 사람들은 아주 인상적으로 기억하는 편이었다. 희미한 존재에게도 가는 사랑. 이렇게 말하면 보다 정확해질지도 모르겠다. 강함보다 약함을 편애하고, 뚜렷한 것보다 희미한 것을 먼저 보며, 진한 향기보다 연한 향기를 선호하는, 세상의 모든 희미한 존재들을 사랑하는 문제는 김장우가 가지고 있는 삶의 화두다. 나는 그렇게 느낀다. 그래서 그는 세상을 향해 직진으로 강한 화살을 쏘지 못한다. 마음으로 사랑이 넘쳐 감당하기 어려우면 한참 후에나 희미한 선 하나를 긋는 남자. p.101~102.


이 문장을 읽으면서 한 선량한 사람을 떠올렸어요. 그 아이는 김장우와 닮았어요. 그 아이는 항상 점선처럼 보이는 희미한 사랑을 내게 보내고, 나도 항상 희미한 사랑을 그에게 보내는 중이에요. 그 사랑은 별처럼 은은하게 빛나서 내 마음에 촉촉하게 스며와요. 오로라 별에 살고 있는 그 사람은 오랜 시간이 담긴 노래와 글과 아름다운 언어를 항상 지구에 살고 있는 나에게 수신하고, 나를 돌보고 항상 살펴주어요. 그는 내 눈에 맺혀있던 눈물 자국을 읽는 것에 집중하는 편이에요. 그는 현상과 사실보다 나의 직감과 느낌과 기분과 과거의 발자취를 이해하고 싶어하는 편이에요. 왜 보이지 않는 자국에 집착하는 것인지, 왜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주면 고맙다고 말하는 것인지 나는 시간의 초반에 이해하지 못했어요. 치유하지 못한 기억을 마주하고 나누는 것은 나의 고통이었기 때문이에요. 어쩌면 그는 너무 착하고, 나는 아주 이기적이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몰라요. 그는 너무 선량하고, 나는 아주 나빴기 때문이었는지도 몰라요. 나이가 들면서 내 자신이 아주 나쁘고, 참 이기적이라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어요. 모든 어른들은 다 그런 생각을 하나요. 모든 어른들은 한 구석에서 자신의 한 부분을 학대하나요. 무엇이 맞는지 잘 모르겠어요. 한편으로는 두 사람을 두고 저울질하는 이 소설이 저의 양심에 완벽하게 와닿진 않아요. 한 사람을 만날 때는, 한 사람만 만나야 한다는 신념이 제게 있기 때문이에요. 안진진의 어항이 와닿진 않지만, 안진진 주위의 남자들이 괜찮은 사람들이라서 다행이라 생각하며 읽어보아요.


"산이 있어 편안한 거야. 도시가 아니라서 그런 거야." 그는 마치 내 마음속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말한다. "산에서 몇 밤을 지내고 서울로 돌아오면 며칠 동안 적응이 안돼. 돌아가고 싶어지지. 산새 소리, 풀잎 눕는 소리, 계곡물에 바람 스치는 소리, 두고 온 그런 것들 생각 때문에 오래 마음이 심란해지지, 도시는 나를 불안하게 해. 어디에 이어도 내 자리가 아니어서 불편해" p.117.


시골과 들판과 숲과 초록을 보면 마음 한켠이 편안해져요. 집 안을 좋아하는 편인데도, 바람에 나부끼는 나뭇잎을 보면 마음이 싱그러워져요. 삶에서 흔들리는 나뭇잎을 보면 충분해. 충만해. 상쾌해. 그렇게 느껴요.


"형이랑 같이 살 때, 난 밤마다 기다렸다가 형이 벗어둔 양말을 깨끗이 빨아서 널어놓은 뒤에야 잠을 잤지. 냄새나는 형의 양말, 나 때문에 더욱 냄새가 날 수밖에 없는 그 양말을 주물러 빨고 있으면 그렇게 마음이 편했어. 지금도 형 집에 가면 형수 몰래 가끔 형 양말을 빨아주고 돌아와" p.119.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타의에 의한 행동이 아닌, 스스로 마음에서 우러져 나오는 자의에 의한 사랑 담긴 행동이라 느껴요. 빨래하는 일은 누군가에게 아무것도 아닌 일이지만,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면 너무나도 아름다운 일이 되어요. 우리가 의지를 가지고 하는 일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이 세상 모든 박물관과 도서관과 미술관은 분명 알고 있어요. 우린 알고 있어요. 우리의 의자가 새의 날개짓처럼 아름다운 것을 알아요.


사람들은 작은 상처는 오래 간직하고 큰 은혜는 얼른 망각해버린다. 상처는 꼭 받아야 할 빚이라고 생각하고 은혜는 꼭 돌려주지 않아도 될 빚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p.127.


전 기쁜 것은 꼭 돌려주려고 하고, 나쁜 것은 나에게서 그치기를 바라요. 그래서 이 말이 잘 이해가지 않아요. 따스한 것, 온기담은 것, 나를 살리는 깊은 맛의 수프 같은 것, 예쁜 것은 후손 대대로 물려지기를 바라요. 망측한 것, 되풀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은 후손에게 절대로 물려주고 싶지 않아요. 그게 나의 마음이에요. 그러니 당신에게 내가 최상으로 감동받았던 나의 순간과 마음을 전달해 주고 싶어요. 나는 항상 착한 사람이 무엇인지 불현듯 떠올려요. 나는 항상 세상에 유익한 인간이 되고 싶고, 고통받는 삶들에게 나의 숨을 내어주고 싶어요. 그래서 나는 착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착한 사람이 되어야만 해요. 착한 사람이고 싶어요. 내 머리와 가슴에는 죽은 태연이가 했던 말들이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것은 지치지 않고 나를 온화하고 올곧게 나아가게 해요.


이모는 내린 눈이 사람들 발길에 짓밟히는 모습을 진정으로 보기 힘들어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눈을 확인하는 일이 이모 인생에 닥쳐온 최고의 고통인 것처럼 굴었다. 나는 축축하게 젖어오는 이모의 뜨거운 손을 잡고 어두운 거리를 달렸다. 달리는 우리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눈은 점점 푸지게 쏟아지고 있었다. p.234.


저는 저의 막내이모의 숨결을 보면 항상 마음이 애뜻해져요. 저는 저의 이모들을 보면 항상 선물을 주고 싶은 마음이에요. 그렇지만, 먼저 선물을 건네준 사람들은 나의 이모들이에요. 나는 마음이 앞서고, 이모들은 행동이 앞서서 나를 너무나 따스하게 챙겨주어요. 이모들은 내가 엄마의 끈끈한 피붙이임을 가장 잘 알고, 나의 슬픔에 누구보다 눈물 흘리고, 아파해요. 나는 이모들을 너무나 사랑해서 눈물이 나요. 어떻게 하면 이 모든 것을 같을 수 있나요. 사랑의 편지에 사랑의 답글을 화답하고 싶어요. 애정에 두터운 애정을 보답하고 싶어요.


나, 여기서 그만 이 생을 끝내기로 했다. 죽는 것보다 사는 일이 훨씬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절실히 개달았거든. 나는 용기가 없어서, 너무나 바보 같아서, 여러 사람이 크게 다치는 대형사고를 만나면 절대 생존자 명단에는 오르지 못할 위인이라는 것 잘 알아. 그러니 이 죽음도 뜻밖에 만난 하나의 사고라 여기자. p.284.


이모의 마음이 진심으로 이해되어요. 이모의 삶을 잘 모르지만, 안진진의 이모의 선택이 이해가 되어요. 산다는 것은 얼마나 많은 용기를 필요하는 것인가요. 산다는 것을 얼마나 많은 모멸과 인내와 고통을 수반하는 것인가요. 산다는 것을 얼마나 많은 눈물과 아픔을 포함하는 것인가요. 헤아릴 수 없는 것들을 생각하면 산다는 것이 까마득해져요. 저는 아직 산다는 것의 의미를 잘 모르겠지만, 산다는 것은 참 고통스럽다는 것을 알아요. 또한, 산다는 것이 너무나 눈부시다는 것도 알아요.



양귀자, 『모순』, 쓰다, 2024.

2025年 8月 31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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