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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밀리 Jul 16. 2021

천국의 계단

‘나’에서 ‘너’로 가는 길, 사랑


엄마를 잃은 정서와 아빠를 잃은 송주, 둘 사이 서로를 생각하는 강한 유대와 추억으로 극은 시작한다. 그 시절 정서의 세계와 송주의 세계는 그 자체로 천국이었다. 어느 날 그 집안에 태미라라는 악이 비집고 들어온다. 태미라와 그녀의 딸 한유리 두 모녀는 정서의 모든 것을 빼앗기 시작한다. 정서의 옷, 정서의 아빠 뿐 아니라 정서의 어린시절, 정서의 사랑 그 자체인 송주까지 빼앗으려 한다. 그들의 무차별적인 깡패행각은 유리가 정서를 차로 치고, 잘못된 사랑에 눈이 잠깐 멀었던 태화까지 합세해 정서인생을 송두리째 이 세상에서 빼앗고 감춰버렸을 때에 절정에  달한다.


극이 한참 계속되어 한 인생이 아예 없어져버릴 때까지 정서는 이렇다 할 복수도, 맞대응도 없다. 어렸을 때에는, 그리고 나름 좀 컸다고 생각했을 때에도 정서의 그런 성격을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정서는 정말 왜 저럴까. 이르지도, 복수하지도 않고 정말 바보같이 왜 저럴까. 작가는 정말 왜 이렇게 정서를 이해안되게 만들었을까. 좀 더 시간이 지난 후에야 정서 아버지의 무능함이나 그밖의 여러가지 사실들 (예를 들면 인생의 어떤 어려움들은 송주로도, 태화로도, 아버지로도 안되고 스스로 헤쳐 나오기까지는 결코 완전히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 등)로 인해 그게 단지 이른다고, 복수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비롯해 또 다른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지만 가장 마지막에 깨달은 것은 그 모든 것이 정서라는 사람의 퍼스널리티이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점이다. 나보다는 남을 더 생각하는 사람. 그게 정서라는 캐릭터를 구성하는 가장 중심축이다. 이르거나 복수해서 내 맘이 편해지고 내 이득을 꾀하기보단 혼자된 아빠를 더 위할 줄 아는 딸. 진짜 사랑은 그 사람으로 인해 내가 좀 찔리더라도 그 사람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작가라는 사람은 한정서라는 캐릭터를 누구보다 심도있게 잘 구축해놓았다는 것이 보였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한정서는 회복탄력성이 매우 높은 인물로 보였다. 송주와의 유학이 좌절되고 못되먹은 유리와 새엄마가 사는 집에서 송주도 없이 지내야했을때도 정서는 슬픔과 우울에 젖어있기 보다 남아있는 태화오빠에게 고마움을 표할 줄 아는 아이였으며, 심지어는 교통사고로 인해 모든 기억을 잃고 김지수로 살던 시절, 자신의 옷가게 문을 닫아야했을 때도, 리어카라도 끌면 뭐라도 못하겠나라는 생각을 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아마 정서는 아주 어린 시절 부모와, 또 세계와 좋은 애착을 형성했을 것이다. 안암으로 세상을 떠난 정서의 엄마가 정서에게 이미 그런 것들을 다 가르쳐주었을 것이다. 바보같고 연약해보이지만 사실은 누구보다 강하고, 어쩌다 불운한 상황을 만나더라도 결코 무너져있지만은 않고 용서할 줄 알고, 또 자신의 아픔에서 벗어나 남을 돌볼 줄 아는 그런 힘은 삶의 밑바닥까지 내려가서야 진가를 발휘하기 마련이다.


한편, 어린시절부터 채워진 적 없던 어머니의 사랑에 항상 배고팠을 태화는 정서가 주는 사랑에 아이처럼 조금씩 눈을 떴었다. 정서는 태화의 그림을 처음으로 칭찬해준 사람이었고, 생일 날 미역국을 먹는 줄도 모르고 산 태화에게 천국 그 자체인 사람이었다. 그랬기에 태화는 다친 정서를 세상으로부터 숨겨서라도 그 사랑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그 시절 태화의 사랑은 유아적인 사랑, 소유하는 사랑, 상대방의 날개를 부러뜨려서라도 내 곁에 두고자하는 소유욕이었다. 그러나 사람은 물건이 아니기에 내 곁에 가두고 숨을 쉬지 못해 조금씩 죽어가는 그 사람을 보는 것은 행복이 아니라 또다른 고통이 된다. 곁에 있어도 힘들고 곁에 없어도 힘들다는 그 사랑이 아마 이런 사랑일 것이다.


극중에서 태화의 정서를 향한 사랑을 처음으로 암시했던 그림은 클림트의 키스였다. 시공간을 알 수 없는 곳에 두 연인은 꽃이 잔뜩 핀 벼랑끝에서 입맞춤을 하고 있다. 편안해보이기도, 생각에 잠긴 것 같아 보이기도 하는 여자의 표정과 달리 여자의 얼굴을 자기쪽으로 끌어당기고 있는 남자의 표정은 도무지 볼 수가 없다. 벼랑의 오른쪽 아래로는 두 사람의 사랑인지 모를 것들이 부드럽게 흘러내리고 있다. 화가는 무슨 마음으로 그림을 그렸을지 모르겠지만 그림이 정말 많이 아름답다는 생각이 오랜만에 들었다. 내 생각이지만 클림트의 그림 속 남자들은 보통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다. 얼굴은 보이지도 않을 만큼 누군가를 안아주고 있거나 사랑하고 있는 작품이 많다. 아마도 클림트 자신도 맘속으로 누군가를 그렇게 뜨겁게 사랑하고 있었을 것이다. 클림트는 동생의 죽음 후에 한동안 붓을 들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한 여자를 정신적으로 의지하고 또 사랑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다른 여자 모델들과 달리 그녀의 모습은 화폭에 잘 담아내기가 힘들었는지 그 여자에 대한 그림은 많이 없다. 내가 직접 만나본 적은 없으니 그 사람이 남긴 그림들로 그 인생을 추측해볼 따름이다.

 

한태화의 작업실을 가득채운 클림트의 그림들



내가 이 극의 숨은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는 한태화라는 인물은 죄의식으로 점철되었긴 하지만 결국 성장하고, 희생하는 사랑이다. 태양을 품으려한 죄로 비록 날개는 다 타버렸지만, 5년동안 정서를 숨긴 죄로 지독한 자책과 죄책을 겪어야만 했지만 한태화의 사랑은 한 곳에 멈춰있지 않는다. 비로소 정서를 놓아준 후에야 태화의 사랑은 ‘나의 행복’에서 ‘너의 행복’으로 성장한다. 그는 정서가 울 때 정서보다 더 아파하고, 누구보다 정서의 안위를 염려한다. ‘나’에서 ‘너’로 간다는 것은 단지 말뿐인 이동이 아니다. 거기에는 상대방의 고통을 인지하고 위로하는 ‘나’를 인정받으려 하는 노력도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네 고통을 알아. 너를 사랑하는 건 나야’가 아니다. ‘내가 네 고통을 안다’는 것조차 드러내지 않고 태화는 뒤에서 묵묵히 정서의 고통을 살피고 지키고자 한다. 누구도 건져주지 못하고 혼자 오롯이 감내해야했던 그 어린시절, 정서의 운명에 드리워진 태미라의 그늘 아래서 같은 아픔을 공유하고 곁에서 함께하던 것은 태화였기에 아마 정서를 가장 잘 아는 것도 태화였을 것이다. 정서 역시 이런 삶을 처음부터 겪어왔을 태화에게 단순한 연인의 감정을 넘어 아가페적인 사랑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랑이 이성으로서의 사랑은 아니더라도 정서에게 태화는 한없이 사랑을 주고 싶은 존재, 그 사람의 사랑이 버겁더라도 곁에 있어주고 싶은, 곁에 있어줘야만 하는 존재이지 않았을까. 정서가 5년간의 진실을 모두 깨달은 후에도 다시 태화에게 돌아와 다 잊고 일출을 보러 떠나자고 말하는 장면이 이제서야 내게도 보였다. 정서를 5년동안 꽁꽁 숨기면서도 감히 정서를 함부로 대하거나 육체적으로 욕심내지 않았던 태화의 사랑은 이미 그들의 사랑이 물리적으로 표현될 수 없는 경지로 넘어가있지 않았는가를 보여준다.


결국 태화는 한번만 송주를 보고싶다는 정서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스스로 희생하며 천국으로 가는 계단이 되어 극을 떠난다. 태화는 정서의 마음을  몰랐을까, 태화가 없는 세상에서 정서가 행복하게 살지 못할 것이란 정서 마음을   몰라주고 그렇게 떠났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태화의 희생으로 비로소 극은 복수와 미움의 고리가 끊기고 용서의 장이 열리는 것을 보여준다. 정서는 유리를 찾아가 말한다. 누구나 사람의 마음엔 시기와 질투가 있으니, 과거에 매여서 자신을 자책하지 말라고.  안에 있는 좋은 것들을 보라고. 그리고 평생을 시달리게한 자신의 의붓어머니에게도 말한다. 태화가 자신에게 눈을 주고 떠났는데 자신이 더이상  용서하지 못하겠느냐고.   정서는 태화곁으로 떠난다. 결국 극의 초기  주인공이었던 송주와 정서가 이생에서 함께 행복한 모습은 더이상   없었지만 극은 영원에 대한 암시를 남기며 막을 내린다. 결말이 너무 동화같이 단순해져버린 것은 아닌가 싶으면서도 결국 우리 인간이 모두 추구해야할 결말은 동화같이 단순하게  삶의 모든 증오와 상처를 용서하고 삶을 긍정하는 것이라 믿는다. 진짜 사랑을 알면,  후엔 삶이든 죽음이든 사실 중요하진 않다. 이미 영원의 영역을 누리고 있기에. 결국 작가가 그리고자 했던 천국은 아픔도 이별도 없는 곳이 아닌, 아픔이별 속에서도 사랑을 지키는  세상의 아름다움이 아니었을까.


어쩌면 나 역시 지금까지 어릴 적 태화가 억지로 만들어낸 네잎클로버처럼 사랑이나 행복을 꿈꿔왔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인생은 그런게 아닌데.. 억지로 소리치고 이곳저곳을 내 힘으로 때려부수면서 찾아내거나 얻으려 욕심내서 얻을 수 있는게 아닌데..힘을 뺀다고 뺐는데도 아직도 잔뜩 힘이 들어가있나보다.


예전에는 덮어두고 비난했던 한유리와 태미라  여자의 평생을 걸친 시기와 질투,  악을 도모하는 마음에도 이젠 한발짝  가까워져  바보천치들의 마음  동기를  것도 같다. 그들의 사랑은 상대방을 소유하는 사랑에 멈춰있을  아니라 상대방을 통해 자신의 이득을 탐하는 것에  목이 마르다. 한평생 악을   악으로, 거짓말을   거짓말로 덮어그들화법에는  남을 정죄하고 탓하는 대사들로 가득차있다. 정서와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회사도 명예도 돈도 포기하고 났었던 송주를 두고 태미라는 말했었다.  짤막한 대사에는  여자의 삶의 가치관과 동기가 모두 담겨있다.


"한 그룹을 끌어나갈 후계자가 사랑놀음에 빠져서 그룹을 팽개치다니. 쯧쯧 아직 가난이 뭔지, 세상이 뭔지 몰라도 한참 모르는 햇병아리야. 너도 설마 그 녀석과 사랑에만 눈이 먼 건 아니지? 적어도 한 그룹의 안사람이 될거라면 사랑 정도는 아침한끼 굶은 정도로 가볍게 넘겨야지 안그래, 한유리?"


그러나 태미라 그 여자는 누구보다 사랑에 굶주린 여자였다. 그런 지독한 굶주림에 세상이 결코 준 적 없던 사랑 대신, 돈을 탐하고, 권력을 탐했다. 그러나 그런 것들로는 조금도 사람의 마음을 배부르게 채울 수가 없다는  것이 인생의 진리일 것이다. 그걸 그렇게 살만큼 살아도 깨달을 수 없었던 그 여자의 진짜 바보같은 인생이, 극의 종결까지 세상 모든 일을 자기뜻대로 억지스럽게 끼워맞추려하고, 사람 마음까지 악을 써서 속이고 뺏으려 노력해야했던 그 인생이, 그룹, 후계자 온통 이런 말들로만 채워진 그 인생이 이제 가엽게도 느껴진다. 겉으로는 이들처럼 극적이진 않았을지 모르지만 나 역시 이 전형적인 악역들의 마음밭과 크게 다를 바 없이 살아왔다.


그러나 정서가 말해준 것처럼 과거는 과거다. 나에게도 내 눈을 뜨게 해주기 위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온 분이 있고, 내가 더이상 그 누구도, 그게 내 자신일지라도 용서하지 못할 건 없다. 진짜 사랑은 소유가 아니라 자유다. 그 자유를 알면 복수에 매이거나 내 몸이 아깝던 희생도 조금도 거리낄게 없어진다. 진짜 사랑을 알게되면 더이상 애써 지키고 보존해야할 ‘나’가 없기에 복수도 미움도 힘을 잃는 것이다. 몇년이 지난 후에 이 극을 다시 보고 나는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예전에는 쉽게 ‘사랑은 무엇이다’ 그런 생각을 자주 했었다. 그런데 사랑을 인간이 감히 정의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잘못이지 않았을까 싶다. 이 세상에는 정서의 사랑, 태화의 사랑, 송주의 사랑이 그랬듯 여러가지 색깔의 사랑이 있다. 무엇이 더 큰 사랑인지, 옳은 사랑인지 다 알 수 없지만 한가지 진실은 사람이 빵으로만 살 수는 없다는 것이다.


구스타브 클림트의 생명의 나무



한참 이 드라마가 상영될 무렵 할머니는 살아계셨다. 이제는 태화가 갔다는 천국에 계실 할머니가 생각나 이 극을 다시 볼 때면 마음속으로 울기도 많이 울었다. 이쪽에서는 저쪽을 감히 상상할수도, 닿을수도 없다는 사실이 곱씹을때마다 참 절망적이다. 목청껏 소리쳐봐도 내 말을 듣기나 하는지 알 수가 없고, 비행기라도 타고 산넘고 물건너 어디 먼 나라에 도착한대도 결코 다시 만날 수조차 없다. 인생에서 왜 이런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분리와 이별이 있어야만 할까. 그러나 그런 순간이 올 때마다 생각한다. 한정서라는 한 인물의 삶 전체로 묘사된 바와 같이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견디어낸다. 사랑이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내게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때 좌절하고 포기할때야 비로소 보이는 것이 소망이다. 그리고 내 자아가 죽은 바로 그 자리에서 사랑이 다시 태어난다. 간절히 바라면 다 이루어진다는 말처럼 그런 사랑을 간절히 바라면 내 안에도 생기게 될까? 내 인생에서도 그런 참된 결실을 맺어 이 세상에 돌려줄때까지는 견뎌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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