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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밀리 Jul 24. 2021

나와 남

모르면서 안다고 생각한 것들

지금보다 더 어렸던 그 시절, 나는 사람들과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착각 속에 살았다. 물론 그런 생각이 겉으로 드러나진 않았다. 오히려 겉으로는 이것을 이미 잘 부인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려 하기도 했다. 그러나 알고 있다고, 믿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 중 실제인 것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진짜 믿는 것들은 사실 믿는다는 말조차 필요하지 않다. 그것이 이미 그 사람의 현실일테니까. 그러나 나는 아직 천상천하 유아독존으로서 겸손을 꿈꾸고만 있었다.


그 결과 나는 꽤 자주 세계와 충돌했다. 물론 나는 무언가를 드러내는 것을 너무 싫어해서 일상생활에서, 그 상황에 당면해서 눈에띄는 갈등을 만들어내지는 않는다. 그러나 마음 속으로 천번을 더 생각해 이것이 누구의 잘못인지, 내 잘못이라면 어디서부터 잘못한건지, 어떻게 했어야 옳은지에 대해 밤을 지새우며 고뇌해야만 했다. 그러한 지리한 번민이 끝난 후에는 자주 죽고싶어지기도 했다. 모든 고민을 끝내고 꽤나 일상으로 돌아왔다고 생각하는 찰나에 늘 갑자기 그런 생각이 나를 찾아왔다. 죽고 싶다기보다는 별로 살고싶지 않다는 말이 옳겠지만. 나와 다른 성향의 내 동생은 자신의 그런 생각들을 굉장히 급진적인 방식으로 드러내서 나를 비롯한 가족들이, 특히 엄마가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런 방식은 진짜 아프다기보다 아프니까 관심 좀 가져달라고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게 사실이었다. 나는 동생을 사랑하지 못하는 나를 인정하기 싫어서 그냥 그런 방식을 싫어했다. 그리고 나의 생각은 드러내지 않는 걸 택했다. 죽고싶다는 생각이 뚜벅뚜벅 나를 찾아오면 나는 무기력하게 그 생각에게 당하고 있다가 조금만 때리고 그만 가주기를 속으로 바라고 있어야만 했다.


처음엔 왜 불현듯 공황이 찾아오는지 그 이유를 몰랐다. 나는 꽤나 괜찮은 삶을 살고 있고 상태도 꽤나 괜찮은데 아픈데도 없고 힘든 것도 없는데. 그런데 내 삶을 추적하고 기록하기 시작하면서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그것의 원인 중 하나가 바로 나의 ‘나중심 세계관’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왜 사람들은 내 맘을 몰라줄까? 왜 내가 생각하는 반응이 없을까? 보통의 경우 인간관계에서 내가 생각하는 정성을 다하거나 어떠한 방식으로든 진심을 표현하면 그에 상응하는 사회적인 반응을 얻기 마련이다. 그런데 성인이 되고 나서 인간관계가 점점 더 넓어지고, 교수와의 관계, 또 상사와의 관계를 새롭게 맺게되면서 나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을 수 있다는 걸 알게되었다. 대부분의 경우 내 정성이나 진심 혹은 좋은 의도 등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사람이 자신이 가진 좋은 마음을 겉으로 표현하거나 진심을 보이는 그런 건 아주 우습게 여기는 사람도 있었다. 처음엔 의아함, 당혹감 그리고는 수치심 등으로 정신적인 타격을 얻는 몇번의 경험을 통해 나는 어쩌면 유아기에 배웠어야 할 나와 남의 차이에 대한 복습, 아니 거의 재학습을 하고 있었다. 나와 남은 다르다. 그리고 한가지 더. 세계는 나에게 그닥 관심이 없다.  


내가 이것을 인지하고 나서도 고통은 꽤 오래 지속되었다. 나와 남은 다르다. 그래서 뭐 어쩌라는 말이냐? 내가 남이 될수도 없고, 내가 남이 되어서 이 상처가 내것이 아니게 될 수도 없다. 지금 당장 나는 너무 아프다. 나는 단지 문제상황에 대한 팩트만 인지한 채로 한참을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서서히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내가 고칠 수 있는 부분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행히 크게 어렵지도 않았다. 그저 내 안에 있다고 생각한 적 없던 것 하나를 깨달으면 되는데 그게 교만이다. 내가 남을 다 안다는 착각과 교만. 내가 세계와 충돌했던 이유는 남을 이해할 수 없어서다. 나라면 그렇게 얘기하지 않을텐데. 나라면 내 수고를 알아줄텐데. 나는 다 아는데, 내가 생각하는 옳은 방식대로 행동하지 않았다하는 생각때문에 남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나는 결코 나를 아는 것만큼 남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나에 대해 너무 잘 알고 내가 가진 역사, 내가 들인 모든 노력과 수고를 다 알지만 남에 대해서는 나에 비해서는 거의 하나도 모르는 수준이다. 나와 남은 다르다라는 명제는 나는 남을 모른다는 사실을 포함하고 있었다.


2학년 전공기초 과목으로 배운 조직행동론에서도 개인이 저지르는 귀인오류에 대해 배운 바가 있다. 인간은 자기자신에 대해서는 ‘지’, 타인에 대해서는 ‘무지’가 기본이기 때문에 self-serving bias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이 편향오류가 발현되는 양상은 다음과 같다. 개인이 일에 대한 성공과 실패의 원인을 규명하는 과정에서, 타인의 성공은 보통 그 인간의 됨됨이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닌, 일의 난이도나 행운 등 외재적인 원인으로 귀인하게 만드는 반면, 자기 스스로의 성공은 (자신이 너무 잘 알고 있는) 자신의 노력이나 자질 등 내재적인 원인으로 귀인하게 한다. 비슷하게 상대방과 자신의 인풋/아웃풋을 비교하여 성과에 대한 공정성을 판단하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인풋은 과대평가하고 잘 모르는 남의 인풋은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기에 사람들은 쉽게 결과에 대한 공정성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나는 남을 모른다. 그걸 진정 뼛속깊이 아는 것이 성장의 핵심이다. 학교에서 근로를 하면서 한 차가운 담당자분을 만난 적이 있다. 명색이 일하러 온 학생인데 일도 제대로 안주고 별 관심도 없고(이제와서 생각해보면 고마운 일이었지만..)자주 조퇴나 휴가를 내셨었다. 나는 왜인지 살갑게 굴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끝까지 정을 못 붙인 그 팀에서 결국 마지막 근로를 하던 날쯤 그 분 아버지가 암투병으로 돌아가셨다는 것 외 등등의 몇가지 사실을 알게되었다. 몇가지 사실과 그분의 인품과의 인과는 있을수도 있고 없을수도 있겠지만 그때부터 서서히 남에 대해 눈을 뜰 수 있었다. 남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삶에서 어떤 투쟁을 하고 있는지 나는 어쩌면 정말 하나도 모른다는 사실이 내 뼛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해가 안되고 헐뜯고 비판하고 싶던 그 사람도 ‘아 내가 저사람을 모르지’하는 생각을 하게 되면 그런 미움이 잠시 멈추게 된다. 내가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보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 사람을 판단하고 비판할 것인가? 그러면 상처에 대한 초인적인 대처능력도 생긴다. 내가 저 사람을 모르듯 저 사람이 나를 모르는데 저렇게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나와 남이 다르다는 생각은 1차적으로 나와 남의 거리를 띄운다. 그래서 방금  사람이  안에 꽂은 화살도 빼낼 시간적인 여유를 준다. 그러나 영원히 둘을 분리시키지는 않는다. 오히려 다음번에는 나와 남이 다르기에  천천히, 그리고  사려깊은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안다는 착각말고 내가 모르는  사람을 매일   알고싶다는 지혜로운 겸손이 생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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