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선 많이 울고 거기선 더 많이 기뻐할게요
어쩌면 고난속에서, 낮고 낮은 곳에까지 내려간 것 같을 때에야 하나님의 음성이 그렇게 달콤하게 들리는 이유는,
그렇게 그 은혜가 크게 와닿는 이유는 하나님이 계신 곳이 본디 낮은 곳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삶의 끝자락 그곳에 내려갈때마다 하나님은 변함없는 산처럼 나를 지키고 나를 지탱하고 계신다. 아버지의 도움을 찾지도, 구하지도 않고 되려 시퍼렇게 살아계신 아버지 유산을 몽땅 챙겨 나간 탕자처럼, 남편의 사랑을 이용해 끊임없이 잘못을 저지르고도 또 용서해줄거라는 걸 알고 집을 나간 아내처럼. 그렇게 살아왔던 지난날. 어찌나 얼굴을 빳빳이 들고 혼자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것마냥 살아와버린 지난날. 그러나 나는 죄인이구나 나는 그저 포로구나. 그분이 나를 구렁텅이에서 건지시는 분이구나..그분을 거기서 만나고서야 비로소 깨닫는다.
하나님은 걱정도, 불안도, 눈물도, 고통도 없는 곳에 계시지 않는다. 그분은 항상 인생에서 강도맞은 자들과 함께하고 그들을 지키고 계신다. 그러니 그분을 만나려면 나도 낮은 곳에 가야하는게 맞다. 나의 눈에도 눈물이 나는 편이 맞다.
성취하고, 성공하고, 기쁨이 있는 곳에도 사실 당연히 주님은 계실 것이다. 그분은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이기에. 하나도 그분의 섭리에 어긋나 이유없이 어쩌다 일어나버리는 일은 없기에. 그리고 물론, 그런 상황에서 그분은 내가 진정 기뻐할 때 같이 기뻐하실 분이다. 그저 팔짱끼고 곁에서 혀를 차거나 니가 지금 그럴때니-하고 멸시하지 않으시는 분이다. 그분은 내가 기쁘면 나보다 더 기뻐하실 나의 아버지 나의 창조주이시다.
그분이 그런 참 좋으신 분이라는 걸 내가 알지만, 이 세상은 나 홀로 사는 곳이 아니기에. 이 세상은 혼자 소소한 기쁨에만 도취되어 있기에는 참으로 슬픈 곳이다. 하루하루 억울히 흘려지는 피,비명과 절규가 가득한 곳이다.
나는 개인적인 나의 아픔과 고통, 우울과 공황을 이겨내고 소소하게 행복하는 것도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웃고 내가 맛있는 걸 맛보는 것도, 그리고 내가 개인적으로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옷을 입는 것도 꽤나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것이 아직 이생의 삶 속이라면, 문밖의 이웃이 굶어죽는 와중이라면, 천국 그곳이 already but not yet이라면. 그렇다면 나의 기쁨은 아주 작게 축소시키고 싶다. 그걸로 쉽게 만족해버리고 싶다. 아주 잠깐만 웃다가도 다시 쉼없이 기도하고 싶다.
성령님, 제게 주신 평안을 제 이웃에게도 주세요. 내가 널 사랑해 정말이란다 제게 말씀하신 것처럼 저들의 귀에도 말씀해주세요. 저들의 기도를 이뤄주세요. 궁극적으로 그 염원을 각 사람의 마음에 직접 심으시고 이루신 분이 홀로 주님 당신이라는 걸 깨닫는 은혜를 주세요. 그래서 소원성취보다 더 달고 아름다운 아버지의 임재, 아버지와 함께함, 함께삼을 갈망하고, 누리는 자들이 되게 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