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계속 빗길에 있겠습니다
맞서싸우고 객기를 부리는 것에도 미학이 있을까? 세상과 동화는 그렇다고 한다. 수많은 극복스토리와 신데렐라 이야기. 어려운 상황에도 좋은 마음을 잃지 않은 이들의 이야기. 그러나 나는 가끔 모든게 불편해진다. 좋은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나쁜 말을 들으면 기분이 나빠진다. 나에 대해 좋게 봐주는 사람이 있다면 진짜 내 가치가 올라가는 것 같고 나에게 틱틱대고 못되게 구는 사람을 만나면 나란 사람이 그런 대우를 받아도 마땅한 보잘 것 없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모든 상황을 투명히 반영하는 나를 바라보고 있을 때면 세상은 나를 한심하게 여기라 말한다. 타인과 세상이 자신을 지배하게 냅두는 한심하고 무능력한 자아. 상황이 불편하고 타인이 불편하고, 그 모든 걸 떨쳐내버리지 못하는 내 자신이 싫음이 더해져서 오늘도 삶의 무게가 무겁게 나를 짓누른다.
세상의 많은 목소리들은 상황에 맞서고 극복해내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다. 상황에 순응하고 굴복하는 건 쉽고, 맞서싸우는 건 어려운 일이니까. 절망은 쉽고 희망은 어려운 일이니까. 힘을 내라고. 세계의 말에 기죽지 말라고. 눈이 와도 울지 않고 비가와도 울지 않고 씩씩하게 말이다. 물론 그래야 할 땐 그래야 할 것이다. 꼭 필요한 일에는 용기를 잃지 않아야 하니까.
그러나 가끔은 울지 않을 수 없을 때가 있다. 폭풍이 몰아치면 기가 죽고 절망을 한다. 눈까지 온다고 하면 그냥 한참을 주저앉아있는다. 한없이 한심하고 나약해진다. 오늘도 상사의 무심한 언행에 상처를 입고 기대가 좌절되면 발에 차이는 돌멩이가 된 듯이 작아진다. 세계가 나를 주물럭거리는대로 이리저리 흔들린다. 어어 이러면 안되는데. 저 사람을, 저 세계를, 나 하나가 어쩌지는 못할테니까. 그저 어지럽고 속만 쓰리다. 이제 난 이런 생각을 하게된다. 절망, 그게 꼭 나쁜 일일까? 절망은 쉽고 희망은 어렵다지. 그러나 어려운 일이 늘 좋은 일이라고 누가 그러던가. 어려운 일이 늘 옳은 일이라고 누가 그러던가.
비가오면 꽃잎이 젖듯이 나는 조금 더 절망하고 있고 싶다. 좋은 마음만 말고 나쁜 마음, 이상한 마음, 나약한 마음도 먹어보고 싶다. 조금은 더 계속 빗길에 머물러 있고 싶다. 세상이 흔들면 흔드는대로 조금은 더 흔들려줘야지. 비가오면 빗길을 걷고 눈이오면 눈길을 걸는 그 길, 가끔은 발걸음이 가볍겠지만 가끔은 우울하게 절망하면서 걸어야지. 힘을 빼고 터덜터덜. 그래도 너무 몰아붙이진 말아야지. 그 언젠가 때가 와서 과거는 과거다, 과거는 지나갔다는 진리가 너무나도 자명한 현실로 내 안에 깊이 받아들여져있을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