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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밀리 Sep 15. 2022

책 [작별하지 않는다]

'사랑'의 다른 말, 작별하지 않겠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흐르던 미칠듯한 더위가 가고 어느새 산책길에 바람이 선선하다. 또 다시 이렇게 한 계절이 지나가고 다른 계절이 와버린 것이다. 시원한 바람이 목을 감싸자 단순한 행복감이 단숨에 차오른다. 아 내가 무엇때문에 그렇게 고뇌했던가. 다 잊혀져버렸다. 이렇게 쉽게도 나의 고민을 무력화시켜버리는 자연앞에 인간은 한없이 겸손해진다.


가을은 회한의 계절이라던가. 길었던 이번 여름, 모든 계획은 번번이 난관에 부딪히고 되돌릴수도 없는 많은 결정을 후회로 채운 시간이었다. 사는게 마음먹기 따른 줄 알았다가 또다시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걸 묵상해야했던 시간이었다. 후회해도, 슬퍼해도, 절망해도 그 어떤 걸 느낀다고 감정이 날 구원할 수는 없었다. 그런 지겨운 인생의 생리를 또 한번 느끼며 여름의 한복판에서 한인타운에서 무심코 샀던 한강의 책을 읽어나갔다.



고등학생 때 읽은 채식주의자는 공감하기 어려운 책이었다. 당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 어려운 작가라고만 생각했었다. 그 후 대학교에 입학하고 그 해 겨울에 읽었던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읽고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감동을 받았다. 표현과 묘사, 그리고 주제선정까지 작가의 감수성이 나와 아주 근접하게 맞아떨어지는 경험은 정말 오랜만에 경험하는 일이었다.



1. 한강이란 장르

한강 소설의 특징은 장르가 불분명하다는 거다. 그녀만의 독특한 주제의식이 있다. 사실 어떤 화려한 글솜씨도, 섬세한 캐릭터 구축도 아닌 일관된 주제의식만이 작가의 인격을 드러내는 법이다.


세계가 그녀의 글을 주목해 본국밖으로 불러내 상을 주는 난리를 떨어도 그녀의 글이 항상 향하는 시선은 그녀의 모국이다. 결코 잊어서는 안되는, 그러나 뼈를 깎는 노력없이는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을, 이제 점점 묻혀가는 모국의 이야기에 그녀는 끈질기게 주목한다. 5월 18일의 광주, 그리고 4월3일의 제주까지. 이데올로기의 이름으로 형제가 형제를 물어뜯고 총으로 쏘고 불에 태우고 시신을 유기한 사건의 기록들이다. 우리는 과연 이런 종류의 글을 어떤 장르로 분류해야 옳을까? 역사소설? 혹은 풀어 말해 민족의 아픔을 담은 소설? 그런 것들로는 아무래도 충분하지 않다. 그리고 그런 독자의 마음을 아는 듯 작품 속 다큐멘터리 감독인 인선은 그녀의 작품을 스스로 이렇게 대변한 바 있다.  


그다지 호평을 받지 못했던 인선의 마지막 영화는 '아버지의 역사에 부치는 영상 시'라는 영화제 기획자의 우호적인 촌평을 부제처럼 매달고 상영되었는데, 지금처럼 미간에 주름을 만든 채 인선은 그 말을 반박했다. 아버지를 위한 영화가 아닙니다. 역사에 대한 영화도 아니고, 영상 시도 아니에요. 놀란 듯한 진행자가 웃으며 매끄럽게 물었다. 그럼 무엇에 관한 영화인가요? 그 질문에 그녀가 어떻게 답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236).



2. '나'는 누구인가라는 의식

내 인생이 원래 무엇이었는지 더이상 알 수 없게 되었어.
오랫동안 애써야 가까스로 기억할 수 있었어. 그때마다 물었어.
어디로 떠내려가고 있는지. 이제 내가 누군지.


한강의 작품은 항상 '나'가 누구인지 정직히 묻는 것에서 본질적으로 발원한다. 이 시대 많은 사람이 눈을 뜨고 살아가지만 의식은 잠들어 시류의 흐름에 휩쓸려 살다간다. 그렇기에 우리는 기회가 있을 때 제대로 깨어 물어야 한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그리고 그런 물음에 폭력이 기록이, 눈뜨고 보기 힘들만큼 생생히 써내려간 폭력의 기록이 대답해준다.



그 겨울 삼만 명의 사람들이 이 섬에서 살해되고, 이듬해 여름 육지에서 이십만 명이 살해된 건 우연의 연속이 아니야. 이 섬에 사는 삼십만 명을 다 죽여서라도 공산화를 막으라는 미군정의 명령이 있었고, 그걸 실현할 의지와 원한이 장전된 이북 출신 극우청년단원들이 이 주간의 훈련을 마친 뒤 경찰복과 군복을 입고 섬으로 들어왔고, 해안이 봉쇄되었고, 언론이 통제되었고, 갓난아기의 머리에 총을 겨누는 광기가 허락되었고, 오히려 포상되었고, 그렇게 죽은 열 살 미만 아이들이 천오백 명이었고, 그 전례에 피가 마르기 전에 전쟁이 터졌고, 이 섬에서 했던 그대로 모든 도시와 마을에서 추려낸 이십만 명이 트럭으로 운반되었고, 수용되고 총살돼 암매장되었고, 누구도 유해를 수습하는 게 허락되지 않았어. 전쟁은 끝난 게 아니라 휴전된 것뿐이었으니까. 휴전선 너머에 여전히 적이 있었으니까. 낙인찍힌 유족들도, 입을 떼는 순간 적의 편으로 낙인찍힐 다른 모든 사람들도 침묵했으니까. 골짜기와 광산과 활주로 아래에서 구슬 무더기와 구멍 뚫린 조그만 두개골들이 발굴될 때까지 그러게 수십 년이 흘렀고, 아직도 뼈와 뼈들이 뒤섞인 채 묻혀있어. ..그 아이들..절멸을 위해 죽인 아이들(317).


수많은 사람이 합심해 더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나는 동안에 단 한명도 의문을 던지지 않았던 걸까? 대체 이들을 하나로 묶어 일을 진행시킨 원동력의 본질은 무엇이었을까. 마치 하나의 개미군단이 아무 생각없이 옆 개미를 따라 이 일 저 일을 저지른 것만 같다. 결국 이데올로기의 이름뒤에 숨은 인류의 본질적 문제는, 인간은 무지하다는 것이다. 끊임없고 오고가는 세대 속에서 인간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결코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따라 어떻게든 행동한다. 그렇기에 과오를 저지른다.

낯선 미국 땅에서 한국책을 읽는 나 역시 '그' 시대, '그' 흐름 속이었다면 같은 생각과 같은 가치, 같은 편나누기 게임에 편승할 개미 한마리였을 것이라는 생각밖엔 지금은 할 수 없다.  


"물은 언제까지나 사라지지 않고 순환하지 않나. 그렇다면 인선이 맞으며 자란 눈송이가 지금 내 얼굴에 떨어지는 눈송이가 아니란 법이 없다....인선의 어머니가 보았다던 학교 운동장의 사람들이 이어 떠올라 나는 무릎을 안고 있던 팔을 푼다. 무딘 콧날과 눈꺼풀에 쌓인 눈을 닦아낸다. 그들의 얼굴에 쌓였던 눈과 지금 내 손에 묻은 눈이 같은 것이 아니란 법이 없다(133)."


시공간을 멈추는 듯한 작가 고유의 시적인 표현들 사이로 인선과 경하, 그리고 인선의 엄마, 정심의 삶이 작품내내 무심히 흘러 지나간다. 군경들이 가족들을 총으로 몰살시키고 집을 불태웠던, 모든 것이 도저히 이치에 들어맞지 않았던 그 시절 제주에서의 소녀 정심은 초등학교 운동장을 뒤져 눈송이아래 얼어붙은 가족들 시체를 찾아 장사를 지낸다. 작품을 탄생시킨 작가의 의식은 결국 이들과 내가 결코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에서 비롯한다. 나라는 사람에 대한 근원은 인간사의 순환성 속에 답이 있는 것이다. 정심과 '나'는 다르지 않다. 정심의 아픔은 나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3. 한강이 말하는 '사랑'

한강은 인터뷰에서 이 책을 통해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썼다고 했다. 사랑이라는 개념에 대한 이해가 범인에 불과한 나는 아리송한 그 말에 고개를 갸웃거릴 수 밖에 없었다. 그 흔한 로맨틱한 장면 단 하나 나오지 않은 소설에서 그녀가 말한 사랑이란 과연 어떤 종류의 사랑이었을까? 나는 그게 너무 궁금했다.


"접시를 김치에 덜어 식탁에 올려넣는 인선의 얼굴이 서울에서 보다 평온해져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인내와 체념, 슬픔과 불완전한 화해, 강인함과 쓸쓸함은 때로 비슷해 보인다. 어떤 사람의 얼굴과 몸짓에서 그 감정들을 구별하는 건 어렵다고, 어쩌면 당사자도 그것들을 정확히 분리해내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105)."


삶에 대한 경이를 또다시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녀의 글을 읽으면 저절로 숙연해진다. 나무를 자르다 손가락이 절단돼 병원으로 이송된 인선은 혼의 형태로 경하를 찾아온다. 그리고 경하를 이끌고 그날에 대해 이야기해 나간다. 한강의 소설이 '역사소설'이라면 그녀가 말하는 올바른 역사의식은 '사랑', 가장 깊은 인류애에서 비롯된다. 지금의 나의 삶과 아무 관련없는 완벽한 타인의 삶이 그 '사랑'으로 이해되고, 그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되고, 그날 그가 맞은 눈이 흘러흘러 나의 삶에도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렇기에 그녀가 말하는 '사랑'은 나라는 인간의 근원을 성실히 추적한 결론이 된다. 나라는 사람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땅에서 갑자기 솟아난 것도 아니라는 것을. 큰 그림 속 아주 작은 조각 중 하나인 나를, 그리고 나와 같았던 수많은 사람이 저지른 짓들을 어떤 희망도 절망도 없이 응시하는 것이다. 그런 사랑은 '나' 스스로에 대한 정직한 사랑이자, 그렇기에 '인류'를 향한 지속가능한 사랑이다.



4. 작별하지 않는다, 무엇과?


"작별인사만 하지 않는거야, 정말 작별하지 않는거야?

...완성되지 않는 거야, 작별이?

...미루는 거야, 작별을? 기한 없이?(193)"


모두 지나간 것은 잊어라, 얘기할 때 끝까지 잊지않는 억척스러움, 강인함, 고집스러움. 그런 것들이 작품에 덕지덕지 묻어있다. 누구도 강제하지 않아도 혼자 끝없이 과거를, 그것도 '정확히 보지 않는 편이 좋은 종류의 것'을 홀로 끝도없이 추적해가는 그녀의 글은 경이롭다. 인간사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아는 죄로 그녀는 평생 글을 쓰는 것일까.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을 수 없도록, 결코 작별할 수 없도록, 글로 쓰고 이야기하는 그녀의 고집에서 인류의 희망이 보인다.


"...나는 안다. 이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 것인지 물었을 때 인선이 즉시 부인한 이유를. 피에 젖은 옷과 살이 함께 썩어가는 냄새, 수십 년 동안 삭은 뼈들의 인광이 지워질 거다. 악몽들이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갈 거다. 한계를 초과하는 폭력이 제거될 거다. 사년 전 내가 썼던 책에서 누락되었던, 대로에 선 비무장 시민들에게 군인들이 쏘았던 화염방사기처럼. 수포들이 끓어오른 얼굴과 몸에 흰 페인트가 끼얹어진 채 응급실로 실려온 사람들처럼 (287)."


작가는 이 폭력의 역사가 어떤 영화 하나로, 혹은 글 하나로 함부로 매듭지어 버리지 않기를 바란다. 기억하기 위해 치뤄야하는 대가로 계속해서 고통받아야 한다면 그녀는 기꺼이 고통받기를 택한다. 함부로 작별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기꺼이 평생 고통받기를 선택한 그녀는 거기에서, 고통인지 황홀인지 모를 이상한 격정속에서, 기이한 기쁨을 느낀다.


"한 발씩 힘껏 땅을 디디고 그 바람을 가르며 걷던 한순간 생각했어. 그들이 왔구나. 무섭지 않았어. 아니, 숨이 쉬어지지 않을 만큼 행복했어. 고통인지 황홀인지 모를 이상한 격정 속에서 그 차가운 바람을, 바람의 몸을 입은 사람들을 가르며 걸었어. 수천 개 투명한 바늘이 온몸에 꽂힌 것처럼. 그걸 타고 수혈처럼 생명이 흘러들어오는 걸 느끼면서(318)."


우리가 고통을 직시할 때 고통은 고통으로 끝나지 않는다. 개인의 삶속에서 생명력으로 이어진다. 절단된 손가락을 다시 봉합하면 몇분마다 매번 바늘로 손가락을 찔러 피가 나오게 해야 한다고 한다. 피가 나오지 않으면 봉합된 손가락이 제기능을 하지 못할수도 있다. 한강의 작품 역시, 멀쩡히 봉합된 손가락을 다시 찌르고 또 찌르는 것처럼, 그래서 그 손가락이 결국, 썩지않고 정상적으로 다시 기능할 수 있도록 우리의 의식을 찌르고 또 찌른다.


5. 그들이 올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흐른다. 맑고 깨끗한 물이 되었든 끔찍한 피의 강이 되었든 강은 반드시 흐른다. 그리고 물이 흘러 다시 해가 뜨고 꽃이 피기도 한다. 그것이 자연이고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의 근원을 알지 못하는 자는 물을 마실 자격이 없다.


마지막 장을 넘기면 다큐멘터리의 마지막 페이지처럼 작가가 사실관계로 참조한 모든 자료들이 정갈히 나열된다. 모든 자료들은 이렇게도 강력한 일들이 사실이라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현실이 더 비극적이란 말이 사실이다. 작품 속 주인공은 바람을 가르며 생각했다. '그들이 왔구나'. 이러한 형식으로 그동안의 비극들이 작가를 찾아왔을 것이다. 그래서 쓰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식으로 광주의 소년이 그녀에게 왔고, 그런식으로 제주의 정심이 왔을 것이다. 이보다 명확한 작품동기가 있을까.


권투경기에서는 이런 이치를 쓴다고 했었나. 주먹이 날라올 때 피하지 말 것. 맞더라도 두 눈 똑바로 뜨고 주먹이 오는 방향을 바라볼 것. 이 작가 역시 동일한 의식, 동일한 고통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그들이 왔을 때' 결코 피하지 말 것. 함부로 작별해버리지 말 것.  





그 외 사사로운 생각들..(나 너머의 것을 추구한다는 것)

한강이라는 작가를 존경하는 이유는 종잡을 수 없는 현대의 포스트모던패턴에 휘말려들어가 또 하나의 이해할 수 없는 자칭 '예술'을 생산해내는 대신 그 모든 혼란을 발생시킨 원인을 정확히 묵묵히 추적하고, 그려내 객관적이고도 주관적인 그녀만의 세계를 구축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이 한 인간을 정말 멋있게 만든다.


나 너머의 것을 이만큼 깊이 느끼고, 이만큼 깊이 생각하고 깊이 기록하는 사람. 이 작가의 삶은 분명 평범치 않은 구석이 분명 있을 거란 생각을 하게 된다.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음식을 카메라 앞에서 먹을 것 같지도, 터무니없이 비싼 물건을 종이로 사기 위해 줄을 설 것 같지도 않다. 따라갈 수조차 없이 빠른 이 세대의 흐름을 쫓느라 혼과 영이 눈코 틀새없이 바쁘지도 않겠지. 세계와 생명에 대해, 이 답없는 광할환 우주에 대해 동이 틀 때까지 깨어 고민하고 자기만의 의미를 찾아낸 사람이지 아닐까. 결코 태어난 김에 시간을 죽이지도 자기연민으로 끝없이 자기속으로 또 과거속으로 퇴행하지도 않을 것 같다.


사실 이 시대는 가시적인 폭력전체주의적 '명백한' 대량학살보다는, 비가시적인 정신의 복잡성의식 박탈이 더욱 집단적인 문제를 일으키고 있기에, 이렇게 현세대의 흐름에서 한 걸음 물러나 가시적인 폭력을 묵묵히 증언하는 글들을 보면 오히려 유행하는 글들보다 더 해석하기 어렵다고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러나 그 어떤 공감의 강요도, 억지스러운 역사교훈도 아닌 올곧은 진실로의 초대에 나는 이내 저절로 반응하게 된다.


인류가 과오를 반복한다지만 기억하고 배워서 조금씩 나아지는 것밖에는 지름길은 없다. 깨어있을 것. 그리고 지나간 일들과 함부로 작별하지 말 것. 그것이 우리가 다가올 날들을 준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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