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서 기대할만한 무언가
불현듯 한주의 초반부터 나를 덮친 우울로 몸이 천근만근 무겁다. 이런 때면 하루 하루를 보내는 것이 납덩이를 어깨에 짊어지고 한발짝 나아가는 것처럼 어렵게 느껴진다.
삶의 의미, 인생의 고통, 불안...이 저주에 또다시 짓눌린 그 누군가는 이쯤에서 정말로 생을 정리하기도 했겠지. 그 덕분에 기억난 영화가 있다.
이란을 배경으로 하는 오래된 영화로 원작은 The Taste of Cherry. 상큼한 제목과 대비되게 내용은 전혀 상큼하지 않다. 무겁고 조용하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자살을 굳건히 결심한 주인공 바디라는 남자는 러닝타임 내내 홀로 SUV를 몰고 동승자를 찾으러 다닌다. 자신의 자살계획을 듣고 도와줄 누군가이다. 더 정확히는 자신의 계획(밤사이 수면제 다량섭취한다-> 공사장 나무 밑 구덩이에 눕는다-> 아침에 누군가 와서 죽은 나의 몸에게 흙을 덮어준다)에서 흙을 덮어줄 그 누군가 찾으러 다닌다.
거액의 현금까지 준다고 해도 그의 계획에 누구도 쉽사리 동참하지 않는다. 첫 동승자인 가난한 어린 군인도, 아프가니스탄 신학생도 그의 계획에 일부가 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바디가 이토록 굳건하게 죽음을 마음먹은 이유에 대해서 감독은 침묵한다. 장면장면 비추는 바디의 공허한 눈빛과 무력하고 고뇌에 찬 몸짓들이 그가 어떤 상태인지 말해줄 뿐이다. 그렇게 연거푸 거절을 당하고 공사장 한가운데 걸터앉아 흙모래를 맞으며 고뇌하던 컷이 끊기자 바디의 옆에 한 노인이 동승해있다. 처음으로 바디의 자살계획에 응한 동승자이다. 그러나 이 시퀀스가 시작되자, 불현듯 '왜 죽지말고 살아야하는가' 연설이 시작된다. 바게리라는 이 노인은 젊은 시절 자신도 어떻게 자살을 마음 먹었었던가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자살을 하고자 새벽에 밧줄을 가지고 올랐던 나무에 체리열매가 맺어있고, 나뭇가지를 흔들어 아이들에게 열매를 떨어뜨려주다가 동이트고, 그러다 그냥 체리를 주워 아내에게 돌아오게 됐단다.
터키 사람 하나가 의사를 만나러 갔어요. 그가 말하길 손가락으로 내 몸을 만지면 아파요. 머리, 다리를 만져도 아프고.. 배, 손을 만져도 아파요.
의사는 자세히 진찰한 후 이렇게 말했어요. 몸은 괜찮은데 손가락이 부러졌군요.
자넨 마음에 병이 들었어요. 다른 데는 문제가 없어요. 생각을 바꿔요.
난 자살을 하려고 집을 나왔지만 체리를 보고 마음이 변했어요. 생각을 바꾸면 세상이 다르게 보인답니다. 낙관적으로 생각해요
이전까지 극내 유일한 화자로서 자신의 자살계획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설득했던 바디는 이번엔 말이 없이 듣기만 한다. 노인은 자신의 젊었을 때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일화, 시, 노래 온갖 장르불문 일관된 메시지를 전한다. 어떤 어조로, 어떤 장르로 말해도 결국 똑같은 이야기다. 죽지말고 살으란 이야기.
시종일관 무표정 무반응으로 듣고있던 바디는 노인이 내릴 때쯤 계획을 확실히 하고자 묻는다. 아침이 되면 바디, 바디 이렇게 두 번 이름을 불러주세요. 제가 살아있다면 저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워주시고 죽었다면 꼭 흙으로 묻어주셔야 합니다. 노인의 연설이 무색하게 묻겠노라는 노인의 확답을 기어코 받아낸다.
두 남자는 헤어지고, 밤이 오고 바디는 구덩이로 향한다. 구덩이에 눕자 바디의 위로 새하얀 달이 지나간다 바디는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러고 날이 샌다. 영화는 그렇게 끝이 난다.
황금종려상 수상작임에도 '지독하리만치 지루한 영화'라는 혹평이 실감날만큼 내 우울함이 원동력이 되지 않았더라면 결코 끝까지 보지 못했을 종류의 영화이다. 그런데 이 지루한 영화가 가진 이상한 생명력이 있다. 자살생각밖에 없는 음울한 주인공 뒤로 시종일관 펼쳐지는 바쁜 공사현장, 이란의 도시사람들, 그리고 장면장면 비추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 생명을 포기하고자 하는 이를 온갖 생명이 감싸고 있는 구조이다. 사실 바디라는 캐릭터도 차분하게 자신의 자살계획을 세우고 조력자를 찾으러 다니는 참으로 기이한 실행력과 생명력을 분출하는 인물이다.
그렇다. 노인의 말처럼 체리 향기같이 사소해보이는 기쁨이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되기도 한다는 것. 누군가와 주고받는 사소한 도움 그런 것들도 충분히 가치있다는 것. 이런 메시지도 충분히 아름다운 진부함일 것이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자살을 이뤄줄 누군가를 찾으러 다닌 이 남자에게 정말 필요했던 건 '너 꼭 살아, 너 꼭 살아야돼'라는 말을 꾹꾹 눌러담은 타인의 이야기이지 않았을까. 결국 영화내내 바디가 외치던 것은 저 좀 묻어주세요가 아닌 저 좀 살으라고 얘기해주세요가 아니었을까. 그런 바디의 조용한 절규에 부응하는 노인의 일관된 메시지가 벼랑끝 주인공에게 '삶'이란 선택지를 다시 고려해보도록 하지 않았을까.
노인이 내리고 바디의 시선은 운동장을 뛰는 어린아이들, 찬란한 나무들, 하늘에 머문다. 자연, 아이들(미래에 대한 가능성), 그리고 나를 도와주는 타인. 이것들은 모두 주인공이 고통스러운 자아에 매몰되었을 때는 그리 오래 시선을 끌지 못하던 것들이다. 살겠다는 선택지를 고려하지 않았을 때는 결코 볼 수 없는 아름다움들인 것이다. 투박하고 상투적으로 포장된 노인의 목소리로 감독이 말하는 이야기도 하나다. 죽지 말고 살아서 꼭 주위를 보라고. 꽤 아름다울지도 모른다고.
무엇이 인간의 삶을 이렇게 고통스럽게 하는가? 파편화된 가정, 비대해진 자아, 분초단위로 변화를 거듭하는 시대, 불안한 미래, 콘텐츠의 홍수...주위에서는 하나 둘 미친 경쟁의 일선으로 달려나가고, 순간마다 나 혼자 이 세상에서 슬그머니 로그아웃해버리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요즘이다. 일찍이 로버트 프로스트는 말했다. 눈 내리는 밤 숲가에 멈춘 시간. 너무 험난한 시간, 나무들과 얼어버린 연못 사이에 서있는 듯한 느낌. 계속 가지도, 그렇다고 멈춰있을 수도 없는 삶의 바로 그 자리에서 지켜낼 약속이 있고, 가야 할 곳이 있다고.
죽지말고 살자. 그래서 다시금 시선을 돌려 나 너머의 것을 바라볼 수 있다면, 그래서 나의 주위를 얼마나 많은 생명이 감싸고 있었는지 알게된다면 죽음은 그 때 다시 생각해보는 걸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