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을 버리는 건 죄다
헤밍웨이의 책을 다시 찾게 된 건 어떤 이의 말 때문이었다. 찰스 부코스키를 읽을바엔 헤밍웨이나 읽으란 말이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미국 작가와 견줄 정도면 헤밍웨이도 다시 읽을 가치가 있을 것 같았다.
초등학교 때 그림책 만들기 시간에 읽은 기억 외에는 성인이 되고나서 이런 고전을 다시 읽을 기회는 흔치않다. 어떻게든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스칠 때 책을 사서 책장에 끼워두는게 수다. 그렇게 사서 끼워두고도 바로 읽지도 않는다. 어느날엔가 인생이 무료하고 더이상 사람과의 소통에 질렸을 때, 반강제적으로라도 읽게되는 것. 그게 내가 나에게 독서를 시키는 방법이다.
어린 소년 하나 외에는 돌봐주고 찾아와주는 가족도 연고도 없는 노인은 어느 날 아침 채비를 마치고 바다에 나간다. 미끼를 던지고 몇날 며칠을 바다위에서 기다리다 큰 고기가 미끼를 문다. 생각보다 더 컸던 이 고기는 노인의 미끼를 문채 배를 이끌고 몇날 며칠을 앞으로 나아간다. 노인과 고기의 버티기 싸움은 치열하다. 누구하나 물러서지 않는다. 하루가 지날수록 고기는 점점 더 수면위로 올라오고 어느날 기회를 잡은 노인은 작살을 꽂아 한판 승부를 낸다. 그러나 고기를 배에 매달고 돌아오는 내내 노인은 상어떼의 습격에 맞선다. 결국 상어떼가 다 살을 물어가고 남은 물고기 뼈만 매단채 노인은 집으로 돌아와 길고긴 항해의 막을 내린다.
이 장난스러우리만치 단순한 이야기가 며칠간 나의 마음을 울렸던 이유는 이러한 종류의 이야기, 연약하고 힘도 없는 한낮 인간이 싸워이기지 못할 것들과 굳이굳이 맞서싸우는 이야기에는 늘 어딘가 뭉클한 구석이 있어서였던가.
뼈만 남은 청새치를 매달고 겨우 항구에 도착하고 노인은 쓰러질 것 같은 몸을 이끌고 낡은 집에 돌아간다. 이튿날 소년은 한층 더 앙상해진 노인의 모습을 보고 눈물을 훔친다. 창밖에서 사람들은 청새치의 뼈를 보고 감탄한다.
"그는 자기가 꼭 하고 싶다는 생각만 있으면 어떤 사람하고도 시합을 해서 이길 자신이 있었다."
노인은 그렇게 꿈꿔온 물고기를 잡아 돌아왔다. 그러나 그것은 무엇을 위해서였을까? 가족도 젊음도 다 떠나간 노인의 삶에 남은 고기잡이에 대한 기이한 열정이 참 신기했다. 아직도 기회가 있다는 스스로 증명해보이고 싶었던걸까. 아무도 이해할 수 없다해도 노인은 집에 기어코 돌아올때까지 단한번도 쉬지않는다. 결코 자포자기해버리지 않는다. 상어떼가 오면 오는 족족 최선을 다해 남아있는 모든 것을 쥐어짜내 맞선다. 헤밍웨이가 노인을 통해 그린 인간의 불굴의 의지, 비록 그것의 동기가 범인에겐 쉽사리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라할지라도 꺾이지 않는 노인의 의지는 한편의 그림작품을 보는 것처럼 경이로웠다.
희망을 버린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야, 하고 노인은 생각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건 죄다, 하고 생각했다.
노인은 낡은 배를 몰고 거센 바다로 향한다. 엄청나게 강하고 큰 고기와 싸운다. 그리고 돌아온다. 과장같아도 이게 이야기의 전부다. 초등학생에게도 인기있는 고전이었을만큼 고전중에서도 참 읽기도, 이해하기도 쉬운 책이다. 노인과 바다, 그게 이야기의 전부다. 굳이 덧붙이자면 소년 정도가 더 있을까. 볼품없는 노인의 모습에 숨죽여 울어주는 유일한 사람인 이 소년이라는 캐릭터는 아마 작가의 거칠고 솔직한 문체 속에도 남아있는 순수가 아니었을까. 노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고긴 항해에 지쳐 쓰러져있다. 그가 한평생 싸워온 바다와 사람들을 뒤로하고 사자꿈을 꾼다. 달콤한 사자꿈에 기대야 그나마 살아지는 인간의 또 연약함까지 헤밍웨이는 놓지지 않는다. 어떤 때는 삶의 지독한 풍파도 이겨낼 것 같다가 금새 유리같이 연약해버리는 인간의 지정의는 헤밍웨이의 작품속에서 모순적인 그 무엇이라기보다는 내 곁의 이웃의 모습처럼, 어쩌면 매일보는 거울 속의 모습처럼 친숙하게 그려진다.
단테는 말했다. 당신만의 길을 가라고. 누가 뭐라고 하든 내버려두라고. 대학교 사망년 인턴도 어느새 한달차다. 달콤하지만은 않은 사회의 첫맛에 하루하루가 고되기만 하다. 먹고사는것에 언제쯤 무뎌질 수 있을까? 글은 좀 더 자주 써야겠다는 생각만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