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보다 친구, 베이징 유랑기 2
솜털 보송보송 하던 시절, 까까머리 소년 이었던 우리들은 어느새 주름진 얼굴에 흰 머리가 섞인 중년이 되어 있었다. 세월의 흐름은 몸을 바꾸었지만, 마음만은 여전히 청춘이었다. 45년 우정을 기념하며 환갑 여행길에 올랐다. 목적지는 중국의 심장, 베이징이었다. 개성 강한 친구들과의 여행이라 혹시나 마음 상하는 일이 생기지 않을까 염려도 되었지만, 설렘이 그보다 컸다.
베이징 서우두 공항을 출발해 자동차로 한 시간 남짓. 만리장성으로 향하는 길은 가로수가 터널을 이루며 인상적인 풍경을 만들어냈다. 어린 시절, 시골길을 달리며 보았던 플라타너스나 미루나무 가로수가 떠올랐다. 요즘 보기 드문 풍경이라 더 특별하게 느껴졌다. 예전에는 기억에 없던 이 길이, 혹시 졸아서 놓쳤던 건 아니었을까 싶다.
버스 창밖으로 펼쳐지는 풍광이 익숙하게 느껴질 즈음, 만리장성 입구에 도착했다. 여느 관광지처럼 기념품 가게와 식음료 상점들이 북적였다. 6월초 임에도 기온은 36도에 육박했고, 베이징의 분지 지형 때문인지 더 더운 듯했다. 다행히 습도는 낮아 걷는 데 큰 불편은 없었다.
케이블카를 타기 위해 마을을 지나 산길을 따라 이동했고, 곧 승강장에 도착했다.
우리나라와 크게 다르지 않은 산세가 이어지더니, 이내 저 멀리 만리장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꿈속에서나 보던 실루엣이 산등성이를 따라 굽이굽이 이어져 있었다. 마치 대지를 타고 흐르는 거대한 용처럼 고요하면서도 위엄 있었다.
북방 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수천 킬로미터에 걸쳐 이 장성을 쌓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것만 해도 수십 킬로미터에 달하는데, 그것이 수백 수천 배로 이어진다니 고대 중국의 규모와 집념은 가늠조차 어려웠다.
하지만 그 웅장함 뒤에는 수많은 이름 없는 백성들의 눈물과 고통이 숨어 있었다. 명령 한 마디에 동원되어 피와 땀을 흘리다 성벽 아래 묻혀야 했던 이들을 떠올리니 마음이 먹먹해졌다. 만리장성은 단순한 돌담이 아니었다. 그것은 제국의 야망이자, 백성의 한, 그리고 인간의 역사와 자연의 시간이 뒤엉켜 만든 거대한 서사시였다.
가족들과 패키지 여행으로 왔던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바람에 닳고, 수많은 발길을 견디며도 그 장성은 여전히 당당했다. 이제는 인공 건축물이라기보다 자연과 하나 된 풍경처럼 느껴졌다.
하산길에 마주한 중국 전통 무용의 춤사위는 여운을 더했다. 바람결에 흩날리는 소매와 유려한 몸짓은 마치 만리장성 위를 흘러간 세월의 그림자 같았다. 그 춤은 말없이 속삭이는 듯했다. 인생은 짧고, 우정은 귀하며, 역사는 길고도 장엄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