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보다 친구, 베이징 유랑기 4
해외여행을 계획할 때 우리는 종종 그 도시의 랜드마크를 중심으로 여정을 꾸린다. 파리라면 에펠탑, 로마라면 콜로세움처럼 말이다. 베이징 여행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만리장성과 자금성, 이 도시의 상징과도 같은 유적지들을 찾는 일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거대한 유적을 마주했다고 언제나 감동이 밀려오는 것은 아니다. 나이가 들어서일까, 마음이 점점 무뎌지는 탓인지, 설렘과 기대는 예전 같지 않았다. 만리장성과 자금성을 다시 찾았지만, 20년 전 가족과 함께 패키지 여행으로 다녀왔던 기억 때문인지, 웅장한 건축물 앞에서도 마음의 울림이 크지 않았다. 감동을 억지로 끌어낸다고 해서 생기는 것은 아니기 때문 일것이다.
예전에 여행을 하다보면, 친절하고 따뜻했던 현지인의 미소, 좁은 골목 담벼락에 조용히 피어난 들꽃 한 송이에게서, 때로는 거대한 기념물보다도 소소하지만 정감있는 장면들이 더 오래 기억에 남을때도 있었다.
베이징의 마지막 날, 현지 지인의 안내로 찾게 된 한 식당. 세월의 결을 그대로 간직한 오래된 목재 문과, 1738이라는 숫자가 새겨진 간판이 우리를 맞이했다. 이곳은 청나라 건륭제 3년에 문을 연 식당 이었다.
‘都一处(Dōu Yī Chù)’
"모두 한 곳에 모이다"라는 뜻이다.
풍문에 따르면, 건륭제가 민간을 시찰하던 중 이 식당에 들러 음식 맛에 깊이 감탄했고, 직접 이름을 하사했다 한다. 그 후 황제가 다녀간 식당이라는 명성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사람들은 황제가 먹었던 음식을 맛보기 위해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그날 식탁에 오른 음식들은 단순한 요리가 아니라 시간과 정성이 빚어낸 하나의 예술이었다.
마치 꽃잎처럼 곱게 접힌 샤오룽바오(小笼包). 반투명한 만두피 너머로 육즙이 흐르듯 담겨 있었고, 입에 넣는 순간 부드럽게 터지며 고기 본연의 풍미가 입안 가득 번졌다. 양고기, 돼지고기, 소고기로 만든 세 가지 만두는 각기 다른 향과 깊이를 지니고 있었다.
또 하나 인상 깊었던 것은 꿔바로우,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탕수육이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하며, 두툼한 튀김옷은 식감의 묘미를 살렸다. 새콤달콤한 소스는 절묘하게 조화로웠고, ‘탕수육이 이렇게 맛있게 만들수도 있구나’ 하는 감탄이 절로 터져 나왔다.
그 외에도 채소와 고기,해산물로 이루어진 20여 가지의 요리들이 잇따라 나왔고, 그 어느 하나도 입맛을 거스르지 않았다. 마치 내 입맛을 미리 알고 주방장이 모든 음식을 요리 한 듯 했다. 식탁은 어느덧 감탄의 공간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우리를 놀라게 한 건, 이 모든 정찬이 8명이 푸짐하게 즐기고도 20여만원 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세월을 담은 공간에서, 오래된 나무 문짝을 열고 들어간 그 순간부터 마지막 숟가락을 놓는 순간 까지. 그것은 단지 한 끼 식사가 아니라, 한 도시가 들려준 깊고 오래된 이야기였다. 자금성보다도, 만리장성보다도 강하게 가슴에 남은 건 바로 이 식당에서의 기억이었다.
이번 베이징 여행의 진정한 하이라이트는 거대한 유적이 아니라, 300년의 시간이 녹아든 원형 식탁 위에 놓인 음식들이었다. 전통과 시간이 배어든 그 맛을 통해, 나는 중국 음식문화의 진수를, 아니 그 나라 사람들의 삶과 정서를 잠시나마 맛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날의 한 끼는, 내 여행의 기억 속에서 가장 따뜻한 순간으로 오래도록 머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