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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아라비아를 간직한 예멘

중동의 꽃, 예멘 2

by 이순열

사막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 거대한 침묵 속에 숨겨진 한 모금의 생명수와도 같은 오아시스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오아시스의 샘물은 삶의 희망이고, 잊고 사는 소중한 기억의 귀환이며, 시간이 멈춘 듯한 공간의 기적이다.


중동 출장의 여정 속에서, 내가 가장 강렬히 기억하는 나라는 석유 부국인 쿠웨이트, 사우디아라비아와 U.A.E, 오만의 화려한 금빛 풍요 옆에 조용히 자리한, 다름 아닌 예멘이었다


한 방울의 석유조차 나지 않는 가난한 나라, 중세 아라비아의 숨결을 고스란히 품은 채 단단한 뿌리를 내리고 오늘도 살아 숨 쉬는, 마치 중동의 마지막 오아시스와도 같은 곳.


오만에서 비행기를 타고 두어 시간. 창밖에 펼쳐진 풍경은 점점 현실을 떠나 화성의 붉은 암석지대를 닮아갔다. 그 붉은 바위의 장막 너머, 마치 마법처럼 돌연 모습을 드러낸 도시가 있었다. 예멘의 심장, 사나(Sana’a). 해발 2천3백미터 고원 위에 자리한 이 고대 도시는, 물 한 방울이 귀한 땅에서 어떻게 생명을 이어가고 있는지, 그 자체로 신비였다. 중세 아라비아의 도시가 구름을 딛고 서 있는 듯한 광경에, 나는 숨을 삼켰다.



공항에 발을 딛자마자, 그곳은 타임머신을 탄 듯했다. 총기를 들고 활보하는 민병대, 허리에 전통 단검 '잔비야(jambiya)'를 찬 청년들, 눈만 내놓은 검은옷을 입은 여인들, 그리고 길거리 곳곳에서 보이는 총기의 잔재들. 낯설고 위태로운 풍경 속에서도, 사람들의 눈빛은 이상하리만큼 담담하고 깊었다. 마치 수백 년을 이어온 역사의 궤적을 그대로 꿰뚫고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거리는 모두 5~6층 높이의 건물들로 가득했다. 대부분이 400년을 훌쩍 넘긴 고건물이라니, 믿기지 않는 이야기였지만, 이후 예멘의 쉬밤(Shibam)이 세계 최초의 마천루 도시라는 것을 알고 나니, 모든 것이 선명하게 이어졌다. 진흙으로 빚은 건축의 기적, 시간의 무게를 이고 선 구조물들… 예멘은 분명, 문명과 야성, 시간과 정적이 공존하는 중동의 오랜 전통문화가 살아 숨쉬는 심장이었다.



유럽인들이 생애 한 번쯤 꼭 가보고 싶어 한다는 그 나라, 예멘.


아무런 준비도 없이, 마음의 빈 공간 하나 없이, 나는 그 미지의 땅에 첫 발을 디뎠다. 그리고 당혹감에 휘청거렸던 그 순간의 나를 떠올릴 때면, 지금도 부끄럽기 그지없다.


그러나 그 낯설고 어지러운 첫 만남 이후로, 나는 예멘이라는 이름 앞에 자주 멈춰 서곤 한다.


그것은 마치 잊을 수 없는 꿈처럼, 사막의 한복판에서 마주친 한 줄기 오아시스,

혹은 현대의 소음 속에서 마주친 고대의 숨결과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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