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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랏빛 향기, 홋카이도 후라노

by 이순열

여름이 오면 생각나면 홋카이도.
겨울에는 아들과 함께, 여름에는 아내와 함께 홋카이도 비에이에 있는 수염폭포를 바라보며 계절은 달랐지만 같은 공간의 기억을 공유할 수 있음은 감사한 일이다. 아직 맞추지 못한 봄과 가을의 퍼즐은 누구와 함께 할 수 있을까?



아침 햇살이 푸른 대지를 살며시 깨우던 날, 나는 홋카이도 비에이의 깊은 숲으로 향했다. 짙푸른 하늘 아래, 자작나무와 침엽수들이 조용히 속삭이는 그 길의 끝에서, 마치 세상이 숨을 멈춘 듯한 장소를 만났다.
바로 시로가네 수염 폭포였다.

폭포는 절벽 사이에서 하얗게 길게 뻗어 내려왔다. 그 모습은 마치 신령한 노인이 긴 수염을 드리운 듯, 고요하고도 위엄 있게 흐르고 있었다. 천천히, 그러나 쉼 없이 떨어지는 물줄기 아래로는 비취빛 계곡이 숨을 쉬고 있었다. 자연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풍경에 마음을 빼앗겼다.

폭포는 말을 하지 않지만, 그 소리는 모든 것을 이야기한다. 바람보다 깊고, 고요보다 맑은 물소리는 오랜 세월 이 땅을 지나간 이들의 속삭임처럼 귓가에 머물렀다.
나는 그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어디에도 닿지 못한 채,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순간이 있다. 바로 그랬다.

그리고 나는 다시 차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와 후라노의 라벤더 밭을 향했다. 여름의 초입, 햇빛이 부드럽게 대지를 감싸 안던 오후, 세상은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토미타 팜의 언덕 위에 서자 끝도 없이 이어지는 라벤더 밭은 마치 꿈속의 언덕 같았다.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라벤더 잎사귀들이 서로 몸을 부딪치며 속삭였고, 그 향기가 공기를 감싸 안아 나를 또 다른 차원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이곳은 보랏빛 향기로만 가득차 있는것은 아니었다. 갑자기 수채화 같은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연보라, 자주, 진분홍이 층층이 겹치며 색의 향연이 펼쳐졌다.



라벤더 향기는 단지 꽃의 향기가 아니었다. 그 안엔 이곳을 가꿔온 이들의 손길, 이 계절을 기다려온 수많은 이들의 설렘이 담겨 있었다. 나는 손끝으로 한 줄기 라벤더를 살짝 어루만지고,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그 향기 속에서 수많은 기억들이 피어났다. 첫사랑의 떨림, 잊고 지낸 여름의 따스함, 그리고 오래된 편지 한 장처럼 마음속에 고이 접어둔 어떤 시간들.

하얀 수염 같은 폭포와 보랏빛 향기로 가득한 언덕. 그 둘은 마치 대조되는 시 한 편 같았다. 하나는 고요한 침묵 속의 울림이었고, 다른 하나는 찬란한 생명의 노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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