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알펜루트 가는길 3
자유여행의 느긋함을 누리기 위해 일부러 알람을 아침 7시에 맞춰놓았다. 하지만 눈을 뜨니 시계는 새벽 4시 반.
여름날, 눈을 볼 수 있다는 기대감이 꿈결에도 나를 흔들어 깨운 것이다.
망설임은 잠시, 그대로 일어나 씻고 호텔을 나섰다. 새벽 5시 반, 도야마의 거리는 고요하다 못해 적막했고, 개미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역에 도착하자, 나 같은 이들이 이미 긴 줄을 이루고 있었다. 설벽이 사라진 지금도 이정도 인데, 성수기때는 어떠할지 상상하기가 어렵다.
4월부터 6월까지는 설벽이 존재한다고 하지만, 여름이 절정에 다다른 7월말인 지금 눈의 흔적이라도 만날 수 있을까.
스위스가 아닌 그것도 서울에서 비행기 두 시간 거리의 일본 알프스 라고 불리우는 산에서, 계절과 무관하게 설경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가슴이 뛴다.
여행이란 단지 좋은 것을 보기 위함이 아닌, 다름을 느끼는 여정이라 했던가.
그 ‘다름’이 오늘 나를 설레게 한다.
‘알프스 익스프레스’라 적힌 빨간 열차를 보고, 잠시 스위스의 빙하특급이 떠올랐지만… 현실은 동네마다 멈추는 완행 열차였다.
도심을 벗어나며 풍경은 변했다.
깊은 삼나무 숲을 지나 계곡을 따라가자, 비로소 이 열차가 왜 ‘알프스’라 불리는지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도야마역에서 약 1시간 반, 드디어 알펜루트의 입구인 다테야마 역에 도착했다.
사람들은 마치 암묵적인 신호라도 받은 듯 우르르 움직이고, 나도 그 흐름에 몸을 맡겼다.
경사형 케이블카를 타고 10여 분, 이어지는 산악버스는 해발 2,450미터까지 50분을 달린다 했다.
한라산 1100고지를 오르는 버스도 숨이 찰 지경인데, 이건 거의 백두산급이다.
처음엔 제주도의 고산지대 처럼 보이던 풍경이, 고도가 높아질수록 점점 달라졌다.
숲은 사라지고, 구릉 위로 초원이 펼쳐지더니…
하늘 아래 뭉개구름이 떠다니고, 눈처럼 하얀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가까이 다가가니 그건 분명 ‘진짜’ 눈.
여름의 땡볕 아래에도 꿋꿋이 남아 있는 만년설인가?
무로도에 도착하자마자 차앞에서 셔터를 눌러대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운전기사가 위험하다며 말리자, 그제야 웃으며 한 걸음 물러선다.
시간은 아침 9시. 늦잠을 잤다면 이 시간을 많이 즐기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내린 이른 아침의 결정에 마음이 흐뭇하고 뿌듯했다.
정상 가까이에서 바라본 다테야마산(3,015m)은 정말 장쾌했다.
흰 구름, 녹색 초원, 그리고 그 사이사이 남아있는 순백의 눈들.
트레킹 길 위엔 아직 녹지 않은 눈이 수북이 쌓여 있었고, 나는 여름옷을 입고 눈을 밟으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계절의 경계가 흐려지는 순간, 나는 감탄과 감동의 경계 또한 허물어짐을 느꼈다.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유튜브에서 보던 바로 그 호수가 나타났다.
미카우리가이케(みくりが池).
화산이 만든 칼데라에 물이 고여 만들어진 고산의 보석.
코발트 블루의 빛깔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깊었고, 호숫가엔 아직도 설벽이 잔존해 있었다.
마치 수천 년의 시간이 머물고 있는 듯한, 정지된 풍경.
이 호수는 단지 무로도의 풍경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 기억으로 남을 풍경이 되었다.
이 여정은 단지 눈을 보기 위한 여행이 아니었다.
사계절의 경계가 무너지고, 일상과 비일상의 틈이 흐려지고, 상상이 현실이 되는 순간을 맞이하기 위한 여정이었다.
여름에 눈을 만났다는 단순한 사실이 아닌,
그 순간을 기다리고, 감탄하고, 감동한 나의 마음이 이 여행을 오래도록 기억하게 만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