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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에서의 온천욕

여름 알펜루트 가는길 4

by 이순열

저 멀리 아래로 코발트 빛깔의 호수가 보인다. 케이블카 차창밖 아래로 짙푸른 숲이 펼쳐지고 아직도 녹지 않은 잔설이 눈앞에 펼쳐졌다.



일본의 스위스라 불리는 알펜루트, 그 마지막 관문인 구로베댐에 도착했다. 시간을 보니 오전 11시 40분.


새벽 4시 반, 설렘에 일어나 도야마에서 첫 기차를 탔다. 1시간을 달려 등산 열차로 10여 분, 다시 하이랜드 버스로 50여 분을 이동해 일본 알프스의 최고봉 다테야마산이 있는 무로도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짧지만 강렬했던 구름위의 산책을 즐기고 반대 방향으로 길을 잡아, 전기 트롤리버스 20여 분, 케이블카, 다시 등산열차를 타고 내려와서야 구로베댐에 닿았다.



이 짧은 시간 동안 이렇게나 다양한 교통수단을 탄 것은 생전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여정이 마치 하나의 긴 음악처럼, 자연과 맞물려 흐르고 있었다.

댐 위에서 마주한 호수는 코발트 블루빛 고요함으로 나를 맞이했다.



그 고요함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웅장한 물소리에 고개를 숙여 아래를 바라보니, 상상조차 어려운 수량의 물이 폭포처럼 쏟아져내리고 있었다.



그 물보라 사이로 무지개가 떠오르고, 그 너머로 펼쳐진 아득한 댐의 장벽은 보는 것만으로도 아찔했다.
쏟아지는 물살에 휩쓸릴 것 같은 두려움과, 그 장면을 마주하고 있다는 경이로움이 뒤섞인 순간이었다.



원래의 계획은 도야마에서 출발해 알펜루트를 횡단, 시오노오마치까지 도착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목적지에 도착해보니 머무를 숙소가 보이지 않았다. Booking.com에서도 마땅한 곳을 찾을 수 없었다.
되돌아 도야마로 가자니 몸이 지쳐 있었고, 완주하지 못하는 아쉬움도 클 것 같았다.

갈등 끝에 마음은 다시 다테야마로 향했다.
그곳에서의 짧았던 시간을 다시 이어가고 싶었다.


한 시간 전 내려왔던 케이블카를 다시 타고 올라, 전기 트롤리버스를 지나 무로도에 도착하니 오후 2시.



그러고 보니 아직 점심도 먹지 못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몇몇 음식점이 보였다.
해발 2,500미터의 휴게소에서 파는 메뉴라 큰 기대는 없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메밀 튀김 소바를 주문했다.


메밀 특유의 거칠고 진솔한 식감, 깊게 우려낸 국물은 라멘처럼 느끼하지 않고 담백하게 속을 채워주었다.
짧은 어휘력으로는 표현이 부족할 만큼, 이번 알펜루트 여정 중 가장 맛있게 먹은 한 끼였다.



도야마로 향하는 마지막 차는 오후 4시.
2시간 남짓의 여유가 생기자,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이 떠올랐다.



일본을 여행할 때마다 온천이 있는 곳을 우선순위에 두곤 했지만 일본에서도 진한 유황온천을 만나기는 그리 쉽지 않았다.
3대 온천, 5대 온천이라 해도 대부분 미네랄 성분이었고, 마지막으로 만난 유황온천은 10년 전 홋카이도 가이유 온천이 마지막이었다.


하지만 오늘, 알펜루트 3천 미터 고지의 무라노에서 피어오르는 유황 냄새가 마음을 두근거리게 했다. 조심스레 산장에 있는 온천탕에 들어가니, 정말 그곳에 탁한 비취빛 유황온천이 있었다.

창밖으로는 한 여름의 설경과 구름이 조용히 피어오르고, 몸은 온천물에 따뜻이 잠긴다.
이보다 완벽한 조합이 또 있을까.
유황의 향, 푸르스름한 물빛, 그리고 천상의 풍경이 어우러진 이 순간, 나의 시간은 멈춘 듯 흘러갔다.



온천탕을 나오니 피부는 맑게 빛났고, 마음은 평화로왔다


구로베댐에서 되돌아가기로 한 결정이 얼마나 잘한 선택이었는지, 몸과 마음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온천욕을 마친 후, 오전에 지나왔던 길을 다시 천천히 걸었다. 이미 지나간 길인데도 모든 풍경이 새로웠고, 자연이 뿜어내는 생기에 몸도 마음도 다시 살아나는 느낌이었다.



익숙한 교통수단을 하나씩 다시 밟아 도야마에 도착하니 밤 7시.
새벽 6시에 떠났던 여정은 정확히 13시간 만에 원래의 자리로 나를 데려다주었다.

역에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가다보니 어둠속에 도야마성이 물에 반영되어 화사하게 피어난 꽃처럼 아름답다.



비록 처음 계획과는 전혀 다른 하루였지만, 지금 돌아보면 이 여정이야말로 진짜 여행이었다.


한순간의 망설임 속에서 피어난 결단, 그 끝에서 만난 깊은 감동과 치유.
그래서일까.
이 하루가, 오래도록 마음에 남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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