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알펜루트 가는길 5
전날 밤, 도야마역 근처의 작은 식당에서 늦은 저녁을 먹고, 조용한 거리를 걸어 숙소로 향했다. 시계 바늘이 밤 10시를 넘기고 있었다.
알펜루트를 끝까지 마무리할 예정이었지만, 마음이 이끄는 대로 중도에 발길을 돌렸던 어제. 그래서일까, 오늘은 조금 천천히, 도야마에서의 하루를 느긋하게 보내기로 했다.
숙소 앞의 도야마성을 걸을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스타벅스를 찾아가볼까, 아니면 운하에서 조용히 배를 타볼까, 여름이면 꼭 타봐야 한다는 쿠로베 협곡 열차도 생각났지만, 알펜루트 패스가 적용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망설여졌다. 그렇게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시간을 흘려보내다, 문득 어제 장엄한 자연을 만나면서 감격 스러웠던 장면들이 머리속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한나절 동안 두 번이나 다녀온 2,500m의 고산. 그 시원한 공기, 탁 트인 풍경, 마음까지 맑아졌던 그곳이 나를 다시 불러냈다.
기차 시간표를 확인하니, 마침 산으로 향하는 열차가 9시에 있었다. 아침 시간임에도 뜨거운 열기가 가득한 이곳에서 시내를 거닐며 다니는것 보다는 시원한 설산에서 트래킹 하는것이 낫겠다 생각이 들어 황급히 씻고 체크 아웃을 마친 뒤, 숨이 차도록 역으로 달렸다. 기차가 출발하기 직전, 간신히 몸을 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이미 설산에 도착한 듯 마음을 상쾌해 졌다.
도심을 벗어나 30여분을 달리자 차창 너머로 멀리 산맥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기차는 철커덕 소리를 내며 그 곁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다테야마역에 도착하자, 근처에 있는 일본 최대 높이 380미터의 소묘 폭포가 떠올라 한 번 가보려 했지만, 셔틀버스 시간이 맞지 않아 아쉽게도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결국 전날과 같은 루트를 따라 다시 산길을 오르기로 했다.
해발 3천 미터의 다테야마산이 눈앞에 펼쳐지는 무로도. 처음엔 한 번만 보면 충분할 거라 생각했지만, 벌써 이틀 동안 세 번째 방문이다. 그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산 위로 향하는 버스 창밖 풍경이 다시금 말해주고 있었다.
트레킹 안내판을 따라 두세 시간짜리 코스를 잡았다.
코스를 따라 오르다가 숨이 찰 때면 그대로 멈춰, 아무 말 없이 자연을 바라봤다. 하늘 빛이 바뀌고, 바람의 결이 바뀌고, 구름이 자리를 옮기며 만들어내는 풍경은 매 순간이 새로웠다. 길바닥에 널부러진 야생화 군락들이 아름다움을 배가 시켰다.
전날엔 보지 못했던 작은 호수가 언덕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졸졸 흐르는 물소리를 따라 눈을 돌리니, 전날 만났던 여름날에도 설벽을 간직한 호수로 물줄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순간, 자연은 따로 떨어진 개체들이 아니라 거대한 하나의 유기체처럼 느껴졌다.
전날 온천욕을 했던 산장을 지나 조금 더 깊은 곳으로 향했다. 매캐한 유황 냄새가 코를 자극했고, 시원한 바람이 땀을 식혀주었다.
거대한 자연이 시야를 채우고, 멀리서 들려오는 계곡물 소리가 귓가에 울리고, 신체의 모든 감각이 살아났다. 자연과 내가 일체가 된 느낌 이었다.
산등성이를 넘자 아래로 넓은 분지가 펼쳐졌고, 색색의 레고 조각처럼 흩뿌려진 캠핑촌이 눈에 들어왔다. 계곡은 가믈가물 멀리 보이는데 물소리가 크게 들리는게 신기했다. 그곳까지 내려가고 싶었지만 시간이 허락치 않았다.
잠깐의 트레킹에도 이토록 가슴이 벅찬데, 히말라야를 트레킹 하는 이들은 어떤 감동을 품고 걷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전날 즐겼던 유황 온천의 여운이 가시지 않아 다시 그곳을 찾으려던 길, 우연히 입장료가 100엔 더 저렴한 다른 산장의 온천을 발견해 들어갔다. 하지만 탁한 비취빛의 유황 온천이 아닌 맑은 온천수여서, 어딘가 아쉬움이 남았다.
하산을 앞두고 전날 먹었던 튀김소바 맛이 떠올라 다시 휴게소 식당을 찾았지만, 식사 후 바로 이동해야 할 시간을 생각하니 여유가 없을 것 같아 발길을 돌렸다. 결국 식사는 미루고 전기 트롤리버스를 타고 내려와, 알펜루트의 마지막 종착지에 도착했다. 그곳은 조용한 시골마을의 기차 역이었다.
기차역에 마침 간이 식당이 보여, 산에서 미처 먹지 못했던 튀김소바를 주문했다. 한 입 먹는 순간, 예상보다 훨씬 깊고 담백한 맛에 절로 감탄이 나왔다. 그 한 그릇이 알펜루트 여정을 따뜻하게 마무리해주는 마침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