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휴식타임을 갖지 않아도 괜찮단 말이야
12월 14일 (7일차)
원래 계획대로라면 오늘은 이동의 날이 되었어야 한다. 그런데 와라즈에서 트루히요를 거쳐 도착한 치클라요에서 에콰도르로 넘어가는 직행버스는 딱 한 버스회사에서 하루에 딱 한 대만 운영한다. 만약 그 버스를 못 탄다면 피우라-뚬베스를 거쳐서 돌아가는 강행군을 하거나, 강제로 치클라요에서 머물러야 한다. 그리고 그 일이 나에게 일어났다.
오늘 새벽 4시쯤, 해가 뜨기도 전에 LINEA 트루히요 터미널에 도착했다. LINEA 운행 지도를 보면 트루히요와 치클라요가 이어져 있길래 당연히 가겠다 싶어서 같은 회사를 이용해 치클라요로 향할 예정이었는데, 그 구간은 운행하지 않는다는 거다. 다른 버스 회사를 이용해야 하는데, 페루 버스의 특이점 중 하나가 버스 회사마다 다른 터미널을 운영한다는 거다. 우리나라처럼 한 터미널 내에 지역별로 다수의 버스회사들이 모이는 게 아니라서 다른 버스 회사를 이용하려면 다른 터미널로 이동해야 한다. 붙어 있는 경우도 있지만 떨어져 있는 경우가 더 많다. LINEA 트루히요 터미널은 하필 다른 버스회사들이 모여 있는 북부 지역과는 달리 남부 지역에 동떨어져 있다. 어떤 버스 회사를 이용해야 치클라요로 갈 수 있을지 몰라서 당황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LINEA 터미널에서는 와이파이가 아주 느리게 터져서 네이버 앱을 붙잡고 Emtrefesa라는 버스가 치클라요로 향한다는 걸 알아냈다.
새벽 4시 반, 3키로 정도 되는 가까운 거리지만 걸어갈 수는 없는 시간이라 택시를 잡았다. 내가 본 카페 글에서는 트루히요 시내가 작으니 5솔 이상 택시비를 지불하지 말라고 했지만 너무 새벽에다 피곤해서 기사가 7솔을 불러도 오케이하고 일단 터미널로 향했다. Emtrefesa 터미널에 도착한 시간은 4시 50분. 치클라요행 버스는 바로 10분 뒤인 5시에 있었다. 기다릴 필요도 없이 짐을 부치고 버스에 올라탄다.
약 3시간 뒤 치클라요 터미널에 도착했다. 다행히 해가 떠 있다. 그런데 치클라요에서 쿠엔카로 가는 버스 회사 이름이 기억이 나지 않아서 와이파이가 되는 LINEA 터미널 대합실로 자리를 옮겼다. 검색해 보니 작년 중순경에 올라온 글에, 매일 오후 5시에 Super semetria라는 버스회사가 쿠엔카로의 버스를 운행하고 있다고 한다. 전용 터미널을 갖추기에는 소규모 회사라서 America express라는 버스 회사 터미널에 기생하고 있다는 말과 함께. 그래서 America express 터미널로 찾아갔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Super semetria는 없다. 혹시나 Cruz del sur가 운행하지 않을까 싶어 카운터에 가 봤지만 역시나 트루히요-과야킬 구간 뿐이다.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터미널에서 나오면 호객행위를 하는 택시기사들이 벌떼처럼 붙는다. 그 중 한 명에게 혹시 super semetria라는 버스회사가 어디 있냐고 물어보니까 여기서 두 블록 떨어진 곳에 있단다. 맞은편에 있던 America express를 가리키면서 저 곳에 있는 것 아니었냐고 물어보니까 제대로 알아듣진 못했지만 자리를 이전했다고 말하는 것 같다. 아무튼 두 블록 맞죠? 세 번 네 번 확인하고 감사 인사를 한 뒤에 드디어 버스 티켓을 예매하러 걸어간다. 오후 5시 출발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은 별로 급하지 않았지만 고산 지역인 와라즈와 달리 치클라요는 너무도 더운 여름이라서 쨍쨍한 햇볕에 눈을 뜨기가 어려웠다.
Super semetria가 있는 곳은 다른 소규모 버스 회사들이 모여 있는 종합 터미널(?) 같은 공간이었다. 그렇게도 찾아 헤매던 “CUENCA”라는 글자를 발견하고 오늘자 티켓을 한 장 달라고 하니까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말해준다. 오늘 버스는 매진이니, 내일 버스를 타야 한다고. 뭐? 하루에 한 대 밖에 없잖아! 이왕 이렇게 된 거, 치클라요에서 하루 푹 쉬고 내일 표를 타는 수밖에 없다. 내일자 차편을 구매하고, 오프라인 지도에서 아무 호스텔이나 찍어서 택시기사에게 데려다달라고 지도를 내밀었다.
보통 페루에서 도미토리 1박 가격은 7천원~만 원 정도. 사전 정보 없이 도착한 이 호스텔은 하필 도미토리가 없는 호스텔이다. 가장 싼 방이 1인실, 2만원. 잠깐 주저했지만 1박만 머물 거라서 흥정도 못하겠고.. 다른 도미토리를 찾아서 움직이기에는 10시간 넘게 버스를 탄 몸이라 너무 피곤했다. 택시비도 더 써야 하고.. 그냥 개인실로 올라갔다. 그런데 2만원의 방 치고 나름 시설도 괜찮고, 와이파이도 빵빵! 뜨신 물도 콸콸콸. 티비에 선풍기에 넒은 침대까지. 도미토리에 가서 하루 고생하는 밤을 보내느니 무작정 이곳으로 찾아온 게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덜 말랐던 양말을 꺼내 보니 역시나 슬슬 썩은 내가 나고 있었다. 양말을 빨아서 널어놓고, 밀린 일기들을 브런치에 업로드하고, 부모님께 잘 살아있음을 신고했다. 시내를 좀 둘러볼까 싶어 밖에 나갔지만 볼거리는 대성당과 시장 정도. 남미의 어느 도시를 가도 같은 풍경인 것들뿐이었다.
페루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중국음식점인 CHIFA에 가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국물도 먹고 싶고 밥도 먹고 싶어서 완탕면과 볶음밥을 시키려고 메뉴판을 덮는데 옆 테이블이 눈에 들어온다. 볶음밥이 남산만하다. 메뉴 두 개 시키면 오늘 여기서 배가 터져 죽을수도 있겠구나.. 완탕면만 주문했다.
홍콩에서 먹었던 완탕면은 8천원에 완탕 세 개, 뻣뻣한 계란면 약간. 그리고 두 그릇은 먹을 수도 있을 것 같은 양이었는데 페루 치파 완탕면은 면과 완탕은 기본이고 닭고기, 소고기, 채소도 듬뿍 넣어준다. 양도 너무 많이 줘서 반쯤 남겼다. (볶음밥 시켰으면 진짜로 배가 터져 죽었을 것이다.)
더 이상은 더워서 못 돌아다니겠는 오후 세 시, 집으로 돌아와서 그동안 못 읽었던 인터넷 소식들을 읽으며 뒹굴거리고 와라즈에서 이곳으로 이동하는 사이 방영된 예능을 열심히 받아서 시청한다. 한국에 있을 때는 TV도 거의 안 보고 영화도 거의 안 봤던 것 같은데 오히려 남미 와서 콘텐츠 대량 소비자가 되어가고 있다. 한국 예능이 이렇게 재밌는지 몰랐네. x0x
치클라요의 특산품(?)이라는 과자, 킹콩! 처음에는 작았는데 점점 크게 만들다 보니 킹콩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길거리에서도 많이 파는데 뭔가 비위생적인것 같아서 브랜드화되어서 점포를 낸 곳에서 구매했다. 위의 킹콩 미니는 작은 킹콩에 초콜렛이 덧씌워진 형태이다. 킹콩이란 게 어떻게 생겼냐 하면 밑의 사진을 보면 되는데 과자 사이에 꾸덕한 카라멜을 많이, 아주 많이, 너무 달아서 설탕사(死) 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이 넣은 것이다. 카라멜 맛도 종류별로 다양하게 갖춰져 있는데 나는 제일 기본적인 우유맛을 샀다. 진짜로 카라멜이 너무 달고 씹기도 힘들어서 나중에는 카라멜 부분을 덜어내고 과자에 조금 붙어 있는 것만 먹었다. 페루에서 기념품을 사오라고 하면 딱 선물로 사가기 좋은 것 같은데,(심지어 진공포장 되어 있다. 상할 염려도 없음!) 두 달 동안 들고다닐 엄두가 안 나서 나만 맛보는 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