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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은 Dec 15. 2016

갑자기, 에콰도르?

원래 자유여행의 묘미는 계획 급변경에 있는거니까

12월 13일 (6일차)


원래 나의 계획은 와라즈에서 20일까지 머물고, 트루히요에 잠깐 들렀다가 리마에서 크리스마스부터 신년을 보내는 거였다. 그런데 트레킹과 내가 그렇게 잘 맞는 사이가 아니라는 걸 깨닫고 와라즈에서의 일정이 일주일가량 줄어들게 되었고, 이후로 어디를 갈까 고민하다가 트루히요, 까하마르까, 차차포야스라는 페루 북부 도시들을 여행하는 걸로 가닥을 잡았었다.


13일 오전까지만 해도 페루 북부의 고대 유적들을 보고 온천이나 하면서 푹 쉬고 올 생각밖에는 없었다. 그러다가 아직 나에게 남아 있는 시간이 보름이나 된다는 걸 자각했다. 대충 계획을 세워 봐도 그렇게 크게 볼거리가 있지 않은 페루 북부 지역에서 한 도시마다 3일 넘게 머물러야 한다는 건 너무 시간낭비라고 느껴졌다.

점심. 매콤한 돼지고기 볶음밥인데 김이랑 계란을 넣었더니 비주얼이 영..

혼자서 고민할 때까지는 “시간낭비지만 어쩌겠어, 이 기회에 페루를 정복하자.”라는 생각이었는데, 함께 파스토루리 빙하 투어를 했던 분들과 점심을 먹으면서 다시 생각해 볼 기회가 생겼다. 어차피 그렇게 시간이 많은 거라면 굳이 페루에만 있지 말고 더 위로 올라가 보라는 거였다. 에콰도르, 콜롬비아까지.


그 말을 듣고 귀가 팔랑거리다 못해 펄럭이기 시작했다. 도미토리 침대에 누워서 루트를 폭풍 검색했다. 비행기를 타고 가려면 다시 리마로 돌아가서 리마-보고타, 혹은 리마-키토 티켓을 끊어야 하는데 시간은 얼마 안 걸릴지 몰라도 왕복 50만원이 넘는 금액이었다. 돈은 없지만 시간은 많은 가난한 여행자인 나는 바로 버스로 방향을 틀었다. 와라즈에서 페루 트루히요까지는 버스로 8시간. 트루히요에서 에콰도르 과야킬로 한 번에 가는 버스가 있긴 하지만 20시간이 넘고, 가격이 10만원에 가까웠다. 과야킬에서 키토까지도 또 다른 버스를 타야 하고. 이것도 비행기에 비하면 훨씬 저렴한 가격이긴 하지만, 트루히요에서 치클라요(페루)로, 치클라요에서 쿠엔카(에콰도르)로, 쿠엔카에서 바뇨스로, 바뇨스에서 키토로 계속 거쳐서 올라가면 버스 타고, 대기하는 시간을 합쳐서 거의 2박 3일이 걸리지만 가격은 절반밖에 안 됐다.

와라즈에서의 마지막 식사! 캐나다 토론토에서 일식 요리사로 일하다 오신 동행자 분 덕분에 이틀간 맛있는 밥을 양껏 먹었다.

직행 버스를 타면 계속 잠만 잘 것 같아서 어디 한 번 페루-에콰도르 버스 여행을 해 보자고 마음먹었다. 사실 치클라요와 쿠엔카 사이 구간에서도 ‘치클라요-피우라-뚬베스-쿠엔카’라는 더 저렴한 경로가 있긴 하지만 길을 돌아가는 루트이고 뚬베스 주변 치안이 상당히 안 좋다고 해서 안전하게 국경을 넘을 수 있는 치클라요-쿠엔카 구간을 선택했다.

세탁 서비스! 아침에 맡기면 잘 빨고 말리고 개서 저녁에 찾아가게 해 준다. 양말도 그냥 같이 맡길걸 괜히 손빨래 해서 고생만 했다.

오후 3시쯤 저녁거리를 사러 밖으로 나가 트루히요로 가는 오후 9시 버스를 예매했다. 아직 맡긴 빨래도 안 찾아오고 짐 정리도 하나도 안 했는데! 심지어 숙소에서 손빨래 한 양말은 마르려면 하루는 더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마음이 급했다. 저녁을 얼른 먹고 빨래를 짐 정리도 빠르게 끝냈다. (너무 정신없이 정리해서 뭘 두고 왔을지도 모르겠다. 멕시코시티에는 거의 10년을 쓴 내 최애 대왕빗을 두고 왔다.) 안 마른 빨래들은 대충 비닐에 넣어서 가서 다시 빨래를 하던가 썩으면 버리던가 하는 마음으로 일단 챙겼다.

아킬포 와라즈 터미널. 크루즈 델 수르에서 옆으로 조금 오면 위치해 있다.

함께 투어했던 사람들, 그리고 며칠간 친구가 된 아킬포 식구들에게도 작별인사를 하고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나왔다. 욕심이 많아 이것저것 다 챙기다보니 짐이 한가득이라서 이동할 때 마다 성격이 더러워진다. 하루에 물건 한 개씩 버리기를 실천할 때가 온 것 같다.

크루즈 델 수르보다 버스 내부는 조금 더 시설이 좋은 듯했다. 그런데 버내식(?)도 안 주고 담요도 안 줘 ㅠ.ㅠ 비싼 건 이유가 있다.

그렇게 8시 30분, 와라즈 LINEA 터미널에 도착해 짐을 부친 후 트루히요행 버스에 몸을 싣고 숙면을 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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