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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섯씨 Nov 11. 2019

퇴사자의 치앙마이, 일상이 된 둘째 달

퇴사자의 치앙마이살이



퇴사자의 치앙마이 한 달 : https://brunch.co.kr/@o3okang/23





한 달 살기로 끝나지 않고 두 달이 된 이유



치앙마이에서의 한 달이 지났다. 내가 정한 최소의 기간이었다.

떠나올 때 막연히 상상했던 이후의 계획은 다른 동남아 도시로 이동해 또 다른 한 달 살기를 해보는 것이었다. 이런 한 달 살기가 도시를 옮겨 다니며 계속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지내보니 생각보다 한 달은 짧았고, 진짜 ‘일상’을 위한 기반을 닦는 데에만 꽤 많이 시간이 흘렀다. 다른 도시로 옮겨간다면 또 새로운 적응기간이 필요할 터였다. 익숙한 건물들과 친근한 식당들, 길을 외우다싶이한 동네가 있는 치앙마이로 자꾸만 마음이 기울었다. 치앙마이에서 하기로 했지만 아직 못 한 소소한 리스트들도 내 발목을 잡았다.


이러저러한 고민을 안은 채 브런치에 ‘퇴사자의 치앙마이 한 달’을 발행했다. 

한 달 동안 짧게 짧게 적어뒀던 일기와 아이패드에 끄적이던 그림일기를 엮어서 올렸는데, 다음 메인에 걸리면서 조회수가 생각보다 많이 나왔고 댓글도 달렸다. 그림일기를 올려둔 인스타그램을 통해 지인들의 개인적인 메시지도 도착했다. (치앙마이 살이와 함께 드디어 SNS를 시작했다.)

대부분의 내용은 요악하면 ‘부럽다’, ‘멋지다’, '나도 떠나고 싶다'였다. 이건 내 기분을 아주 부끄럽고 이상하게 만들었다. 사실 내가 한 거라곤 집에서 뒹굴거리다가, 비행기표를 끊고 넘어와 또 여기서 집처럼 뒹굴거리는 것인데! 물론 그들도 그 사실을 알고 응원을 겸해 한 말들이지만 그냥 모든 게 부끄러워서 이러쿵저러쿵 대댓글을 적어보다가 결국 아무 말도 못쓰고 지웠다.




두 번째 Daum 진출에 신나서 찍은 스크린샷, 치앙마이에서의 일상과 그림을 올리고 있는 SNS




일기를 다시 읽어보니 지금 내가 치앙마이에 있는데도 치앙마이에서의 한 달이 그립게 느껴졌다. (보고 있어도 보고시풔..) 이제 막 친해진 친구를 떠나고 굳이 서둘러 다른 친구를 사귀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회사 휴가 기간이 정해져 돌아가야 할 사람도 아닌데 '한 달 살이'에 집착해 숙제처럼 해치우려 할 필요가 없었다. 좀 더 여유를 갖고, 이곳에 더 머물러보기로 했다. 내 마음이 가지 않는데 굳이 다음 걸음을 재촉할 필요가 없으니까.




나도 충분하다고 느껴질 때가 오면 그때 떠나지 뭐.






치앙마이에서 둘째 달을 지내기


치앙마이에서의 둘째 달은 첫 달과는 조금 달라졌다. 새로운 숙소 위치에 맞춰 변화된 것도 있지만 가장 많이 바뀐 건 내 마음인 것 같다. 더 이상 치앙마이가 나에게 새롭거나 설레지 않았고 익숙한 내 동네 같았다. 전엔 '치앙마이'에 집중해 여기저기 뭐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했었는데, 이제는 그것보다는 '나' 혹은 '내 일'에 집중하게 되었다.



1. 행동반경이 좁아졌다.


행동반경이 숙소를 기준으로 많이 좁아졌다. 숙소를 좋은 위치에 잡기도 했지만, 전에는 치앙마이 곳곳을 쏘다녔는데 이젠 아직 안 가본 곳이 있더라도 굳이 찾아가고픈 마음이 안 들었다. (내가 일산에서 20년을 살았지만 유명하다는 일산 맛집도, 꽃박람회도 안 가게 된 것과 비슷하다.) 

책상에 앉아있는 시간도 늘어났다. 숙소 바로 옆에 있는 카페가 노마드들이 많아 일하기 좋아서 하루 종일 거기 앉아 일만 하기도 했다.



2. 소박하고 만족스러운 루틴이 생겼다.


느지막이 일어나 아점(아침 겸 점심)으로 싼티탐 숙소 근처에 자주 가는 식당들 중 한 곳을 간다. 모두 근처에 모여있는데 어디를 가도 맛있으니까 그중 문 연 곳을 가면 된다. 누들 집 2군데와 족발집, 태국 밥 요리를 파는 곳 총 4군데를 찍어두고 번갈아 방문했다. 아점만으로 아쉬운 날에는 그 근처 좋아하는 도넛 가게에서 후식을 먹고, 바로 옆 카페로 가 길을 지나가는 현지인들과 고양이들, 관광객들을 구경하며 노트북으로 일을 한다.


가정식 단골집에서 보이는 싼티탐 풍경
맛있지만 빨리 Sold Out 되는 도넛 가게



또 가끔은 잠에서 깨자마자 눈도 다 못 뜬 채 운동복을 챙겨 입고 바로 아래층에서 요가 클래스를 들었다. 그러면 운동도 했겠다 집 맞은편에서 꾸덕한 아보카도 과일주스를 사서 아침을 대신해 먹었다. 그런 날은 운동을 했다는 사실이 뿌듯하고 상쾌해져서 기분 좋게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이런 나만의 작은 루틴과 단골집은, 지난달 새로운 맛집과 카페를 찾아다니던 것과는 다른 만족감을 줬다. 아침마다 '오늘은 어디로 갈까'하는 고민의 시간이 줄어들었고, 지금 먹으면 만족스러울 메뉴가 뭔지 확실히 알기 때문에 실패할 일도 없었다. 나를 알아봐 주는 직원들의 눈빛이나 메뉴를 추천해주는 작은 변화도 좋고 단골집에 앉아 가게의 분위기, 일하는 직원들, 점심시간에 잠시 들러 음식을 포장해가는 현지인들을 구경하며 진짜 치앙마이의 일상에 스며드는 느낌이 좋았다. 물론 첫 달에는 새로운 가게에 도전하고 이전에 몰랐던 장소를 찾아다니는 ‘발견의 재미’가 있었기에 둘째 달이 무조건 더 좋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이번 달에는 타지에 나만의 단골집을 만드는 그 재미도 깨닫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몰랐었던 그 느슨한 친근함이 좋았다.



타지에 나의 단골집이 생긴다는 것


싼티탐에서 자주 방문한 아카아마 커피. 시그니처 마니마나 커피가 맛있다!





3. 액티비티를 많이 해보았다.


'어디를' 관광할까 보다 '무엇을’ 할까에 더 집중해 다양한 액티비티를 해보았다. 치앙마이엔 한국보다 저렴하고 외국인이 많아 영어로 진행되는 수업이 많으니 해볼 만한 액티비티가 많다. (지난달에도 첫 주에 공원에서 하는 무료 요가와 원님만에서 하는 무료 스윙댄스 수업에 참여해보았다.)


- 쿠킹클래스 : 태국에서 빠질 수 없는 대표 액티비티 중 하나. 특히 태국 요리를 좋아해서 해외 살이 To Do 리스트 중 하나인 '태국 요리 하나 마스터하기'를 달성하기 위해 클래스를 신청해 들었다. 낯선 재료들의 소개도 듣고 태국식으로 요리도 해보고 먹어보는 과정이 굉장히 즐거웠다. 결과물도 살면서 내가 만들었던 어떤 음식 보다도 맛있었다. (원래 요리 안 함) 그리고 난 아무것도 마스터하지 못했다.


- 요가 : 지난달에는 무료 요가 클래스들이 많으니 이것만 잘 챙겨 들어도 충분하겠다 싶었지만 무료인 만큼 절대 성실히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숙소 건물 1층에 괜찮은 요가원이 있어 약간 비싼 편이지만 그곳에서 수업을 들었다. 훨씬 소수의 인원으로 진행하여 선생님의 코칭을 바로바로 받을 수 있어 좋았다.


- 무에타이 : 정적이고 느린 요가와는 또 다른 재미가 있었다. 손에 영화처럼 붕대도 감고 글러브를 끼고, 기합에 맞춰 치고 차고 하니까 스트레스도 풀렸다. 다만 나 빼고 모두 남자인 데다 어디서 운동 좀 해본 분들 사이에서 듣게 되어 좀 민망했다는 점이 흠. 우락부락한 운동선수 같은 백인 남자들 사이에 나만 겉도는 느낌이라 수업은 재미있었지만 또 가지는 않게 되었다. 소속감이 안 생긴달까.


세상에서 제일 느린 주먹

 


- 클라이밍 : 치앙마이에는 클라이밍 센터가 얼마 없다. 우연히 구글맵을 살펴보다가 ‘No Gravity’라는 이름이 인상 깊어 방문해보게 되었다. 굉장히 높은 코스들을 로프에 매달려 완등 하는 곳이었다. 클라이밍은 생전 처음이니까 뭔가 이론적인(?) 교육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바로 장비를 채워주시더니 올라가라고 올라가라고 해서 결국 어리둥절한 채 끝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물론 스탭이 로프를 당기면서 계속 도와주셨기에 가능했다.) 한 발 한 발 내디뎠을 뿐인데 어느새 까마득한 높이에 매달려 있다는 사실이 무섭기도 동시에 짜릿하기도 했다.




4. 태국어를 아-주 조금 써봤다.


이 항목을 넣을까 좀 고민을 했는데, 왜냐면 태국어라고 해봤자 여행 중 들리는 손에 꼽는 몇 단어만 했기 때문이다.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실례합니다.’ ‘얼마예요?’ 그리고 '세 자리까지의 숫자’ 정도. 기초적인 대화조차도 안되긴 하지만 관광객으로서 쓰는 최소의 표현들. 몇 가지 음식 메뉴들은 이미 태국어로 주문하곤 했으니까 (똠얌꿍 등) 식당에서의 기본 대화는 이것만으로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생활이 훨씬 즐거워졌다. 지나가면서 태국어로 ‘타오 라이 카?(얼마예요?)’ 했을 때 그분이 태국어로 ‘썽러이 하씹 밧(250밧)’라고 답하고 그걸 알아듣는 것만으로도 마치 현지인이 된 것 같아 꽤 뿌듯해진다. 또 한 번은 식당에서 식사를 마치고 지나가던 주인아저씨께 태국어로 얼마인지 물어보자 ‘오~ 유 스픽 타이~’ 라며 굉장히 좋아하시고 이어서 영어로 태국의 이것저것, 한국의 이것저것, 한국에 방문하셨던 일화나 북한에서 온 사람들을 만난 일화들을 얘기해주셨었다. 별 것 아닌 짧은 태국어였을 뿐인데 이런 즐거운 시간이 생기다니. 치앙마이는 외국인 관광객이 많아 영어로 메뉴를 주문하고 계산을 하는 것이 당연한 분위기라 그 사이에서 내가 조금 더 특별해진 기분을 줬다.

다음에 해외살이를 하게 되어도 꼭 기초 표현은 현지어로 익혀야지.




5. 치앙마이의 밤을 더 즐겁게 보내게 되었다.


늦게 일어나서 늦게 잠드는 야행성 패턴의 내가 치앙마이에 처음 와서 아쉬웠던 점은 문을 일찍 닫는 음식점들이 꽤 많다는 것이었다. 빠르면 4시, 대게 6시에 문을 닫고 유명한 메뉴들은 오전에 동나는 곳들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저녁식사 이후에는 밤늦게까지 여는 카페에 가거나 음료 정도만 사서 집에 가는 등 조금 심심하게 보내곤 했었다.

언젠가 야식이 고픈 날, 이대로는 잠들 수 없을 것 같아 옷을 챙겨 입고 탐방을 나간 날이 있었다. 한 꼬치구이 가게가 한창 장사 중이었는데(첫 숙소는 외져서 밤에 문을 여는 가게가 많지 않았다) 현지 젊은이들 뿐인 데다가 태국어밖에 없고 구글 리뷰도 없어 포기했었다. 한 달 살이의 마지막쯤에야 '에이 한 번 도전해봐야지!' 싶어 처음 방문하게 되었다. 우선 남들이 하는 것을 보며 눈치껏 바구니를 챙기고, 진열된 꼬치들을 골라 담았다. 사실 뭐가 뭔지 모를 고기들이 많아 대충 이것저것 담았으니 '골랐다'는 표현은 안 어울릴지도 모른다. 직원이 바구니를 건네받아 가격을 체크하고, 맵기를 묻더니 즉석에서 구워주기 시작했다. 걱정 반 설렘 반의 기다림 끝에 먹은 꼬치구이는 완벽하게 구워져 굉장히 맛있었다! 맥주와 함께 먹으니 저렴한 가격에 이만한 야식이 없었다. 


싼티탐 중심의 오거리 근처에는 밤만 되면 꼬치집들이 굉장히 많이 열리는 데 하나에 5밧~10밧 (200원~400원) 수준이고 현지 대학생으로 보이는 젊은이들이 우르르 모여들어 늦게까지 활기차다. 치앙마이에 방문한다면 꼭 한 번쯤 경험해볼 만하다.


이것저것 꼬치를 골라 맵기를 말하면 완벽하게 구워주는 '삥(꼬치)' 요리



놀거리도 더 많아졌다. ‘The North Gate Jazz Co-op’은 관광객에게도 워낙 유명한 치앙마이의 대표 재즈바이다. 낮에는 그저 허름한 건물일 뿐이지만, 밤만 되면 사람들이 모여 도로까지 차지하고 시끌벅적해진다. 연주자의 땀방울까지 보이는 코앞 VVVVIP 자리에서 열정적인 공연들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아마도 치앙마이에서 내가 가장 사랑했던 장소. 둘째 달에는 이 곳 외에도 다른 재즈바들도 찾아다니게 되었는데, 그중 세련된 인테리어와 멋있는 칵테일바가 색다른 느낌을 주는 'Moment's Notice'도 정말 좋았다. 조금 외진 곳에 있지만 오픈한 지 얼마 안 되어 내부가 깔끔하고 잔잔하고 모던한 음악들을 즐길 수 있어 열정적인 콘서트 분위기의 노스게이트 재즈바와는 또 다른 느낌을 줬다.


밤만 되면 시끌벅적 열정이 넘치는 나의 최애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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