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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리 Sep 21. 2023

지리산에서 캠핑을 하다

지리산 천왕봉 캠핑장

9월 중순. 여름의 끝자락에 있지만 여전히 한낮은 뜨거웠다.

계곡으로 가면 덜 더울까 싶어서 바닷가에서 산으로 캠핑지를 옮기기로 결정.


가는 길에 어릴 적 부르던 동요가 계속 입에 맴돌았다.

'산하고 바다하고 누가 누가 더 푸를까? 내기해 봐라~~ 내기해 봐라~~'

아무 생각 없이 흥얼거리다가 문득,

"왜 산하고 바다하고 경쟁을 시키지? 둘 다 푸르면 안 돼?

 바다는 바다의 색이 있고, 산은 산의 색이 있는 건데 말이야. 참 세상 각박하네.

 그리고! 동요에 '내기'라는 가사가 들어가도 되는 거야?

 아이들에게 도박을 조장하는 거 아닌가?"


허공에 대고 무심코 중얼거리며 떠들다가 괜스레 기분만 몽몽해졌다.

이 동요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황폐화된 산에 나무를 많이 심자는 뜻으로 육석중 선생님께 가사를 의뢰해서 만든 곡이라고 알려져 있다.

아이들 입을 통해 불려지게 한 노래 하나 때문에 비천한 신분인 서동에게 시집간 선화공주의 이야기처럼 국민들을 세뇌시킬 의도로 만들어진 노래가 아닐지 감히 짐작해 본다.

뭐... 의도야 어쨌든 나무를 많이 심는 건 좋은 거니까...


이런저런 쓸데없는 소리를 하다 보니 어느새 지리산 자락에 도착했다.

한 번 피칭을 해봤다고 이제 제법 손이 척척 맞아 시간이 꽤 단축되니 기쁠 따름이다.

뭐든 처음 해보는 건 어렵지만 일단 알고 나면 쉽다.

물론 그렇다고 힘과 노력이 안 드는 건 아니지만 확실히 덜 드는 건 사실이다.

아무래도 덜 헤매게 되니까.

쓰레기봉투를 받으러 갔더니 쥔장 아저씨께서 구운 달걀을 나눠 주셨다.

마트가 아닌 키우는 닭이 낳은 알을 먹어보게 되다니.

심지어 귀한 청계알도 하나 끼어 있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시골인심이던가.

서울 촌놈은 마냥 신이 날 따름이다.

이때만 해도 몰랐다. 목청 좋은 닭들의 울음소리에 새벽부터 강제 기상하게 될 줄은.

명색이 지리산까지 왔는데 캠핑장에만 있을 수 없어 차를 몰고 지리산 성삼재 주차장으로 갔다.

살면서 한 번도 지리산에 가본 적이 없어 노고단까지 오를 생각에 가슴이 설레었다.

지리상의 정기를 제대로 받고 오겠어!

하지만 도착하자마자 국립공원은 강아지 출입 금지구역이라는 현수막이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왜... 왜 때문이죠?

등산로 입구를 망연자실 쳐다보고는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아쉬우니 전경이나 보고 가자 싶어 한 번 휘리릭 보고 사진 한 장 찍은 게 전부.

쩝. 이제 갑시다요.

차로 가는데 공무원으로 보이는 관리자가 애견 출입 금지라며 벌금을 운운한다.

출입 금지라고 해서 등산 포기했고요,

바닥에 내려놓지 않고 계속 안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경고를 먹었다.

주차장마저도 반려견 출입금지인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던 일이다.

옆지기가 싫은 내색을 하니 관리자가 벌금 60만 원을 재차 강조한다.

이 정도면 협박 아닌가?

순식간에 우리 부부는 몰상식한 인간이 되어 버렸다.

그럴 거면 주차장 입구에 써놓지, 주차비는 다 받으면서...

우린 쫓기듯 그곳을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지리산 정기는 개뿔. 내가 다신 지리산에 발을 들여놓나 봐라!

애꿎은 지리산에게 괜히 화풀이다.

쫓겨났으니 기분이 좋을 리 없지만 그렇다고 여행의 기분까지 망칠 순 없지.

캠핑장으로로 돌아와 계곡물에 발을 담갔다.

분했던 마음이 시원하게 씻겨나가는 듯했다.

"하니야~ 다음 생에는 인간으로 태어나렴. 그래서 가고 싶은 곳 마음대로 다니며 살아."

울적할 땐 먹는 게 최고.

쥔장 식당에서 파전과 막걸리를 주문해서 먹었다. 신선놀음이 따로 없구나.

통삼겹으로 훈연으로 익히기 위해 두 시간 전에 그릴에 넣었다. 두 번째 시도다.

첫 번째는 덜 익었고, 두 번째는 너무 익었다.

초짜 요리사라 시간과 온도를 맞추는 게 쉽지가 않다.

세 번째는 아직 시도 못하고 있지만 잘 되거라 살포시 기대를 해본다.

이번 여행은 결혼 20주년 기념 여행이다.

한 남자와 20년을 살았다는 게 새삼 놀랍다.

전혀 모르는 남남으로 살다가 가족이 되어 살 부비고 살아간다는 게 엄청난 기적처럼 느껴졌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부부는 하루하루가 기적의 연속이다.

이 기적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모르겠지만 매일의 기적에 감사하며,

앞으로도 기적 속에 살고 싶다는 소망을 품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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