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향한 그리움

by 정희리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엄마는 내 보호자였다.

혼자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갓난쟁이를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씻기며 헌신적으로 어린 딸을 돌봤다. 분명 눈물 쏙 뺄 만큼 힘들고 버거운 적도 있었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그 시절에 대한 기억이 내게는 없다. 만약 인간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모든 걸 기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면 아마 지금보다는 부모님께 더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서였을까.

신은 내게 영유아 시절의 기억 대신 직접 체험해 보라며 엄마의 보호자가 될 기회를 선사해 주었다.


급성 백혈병을 진단받은 이후 엄마의 체력은 급격히 떨어졌고, 마냥 강인했던 엄마는 보호자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이로 변해갔다.

일곱 살 아이처럼 굴더니 여섯 살, 다섯 살, 네 살, 세 살 아이들이 겪는 과정을 거쳐 걸음마를 연습해야 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오래전 엄마가 내게 해줬듯 이젠 내가 엄마의 기저귀를 갈아주고, 이유식을 떠먹이고, 유모차에 태워주고, 걸음마를 가르쳐야 한다.

24시간 엄마의 손길을 필요로 하던 딸이, 24시간 딸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엄마와 마주하게 된 것이다.

점점 아이가 되어가는 엄마의 모습에서 내 어린 시절이 겹쳐졌다.

세월의 야속함에 왈칵 눈물이 쏟아졌지만 울 수가 없었다.

내가 울면 엄마가 삶의 끈을 놓아 버릴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일부로 더 많이 웃었던 것 같다.

악착같이 웃다 보니 자연스레 버틸 수 있는 힘이 생겨났다.

하루하루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여유도 생겼다. 엄마와 함께 하는 지금 이 순간이 너무도 소중하다는 걸 깨닫자 더 이상 울지 않게 되었다.


난 엄마가 영원히 내 옆에 있어 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세상에 죽음을 피해 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지만 죽음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은 더더욱 없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우울하게 이별을 준비하고 맞이한다면, 그 끝은 어떻게 될까.

세상에 모든 부모들은 언젠가 우리 곁을 떠난다.

아무리 울며불며 애원을 해도 운명이 다한 부모는 결코 돌아오지 못한다.

그러니 살아계실 때 효도를 다하라는 판에 박힌 말은 하고 싶지 않다.

다만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의 소중함을 깨닫고 하루라도 더 웃으며 시간을 함께 보내길 바랄 뿐이다.


갑작스러운 시한부 판정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셨다.

삶에 연연하지도 않으셨다.

그저 눈 뜨면 시작하는 하루를 받아들였으며 눈앞에 주어진 삶에 충실했다.

나 역시 그래야 했다.

아무리 발을 동동 구르며 날뛰어도 엄마를 살릴 수 있는 능력이 내게는 없다.

대신 엄마를 돌봐드리며 웃게 해 드릴 수 있는 건 오직 나뿐이다.

그 어떤 상황이 닥치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현실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철부지 딸은 면역력이 약한 엄마를 위해 세균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영양가 있는 환자식을 개발하고, 엄마가 민망하지 않게 재빠르게 기저귀 사용법을 익히고, 때론 친구처럼 때론 엄마처럼 곁에서 챙겨주는 보호자로 거듭났다.


부모 자식 간의 끈이 제아무리 질기다 한들 영원할 순 없다.

당장 내일을 기약할 수 없기에 오늘 최선을 다해 행복해질 필요가 있다.

그래야 사랑하는 가족이 떠나도 후회와 미련이 남지 않는다.

남은 건 그리움 하나면 충분하다.

후회와 미련은 한이 되고, 그리움은 추억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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