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 입구의 붓 조형물 '일획을 긋다'를 그렸다
▲ 일획을 긋다 윤영석 조각가의 2007년 작품이다. 인사동을 상징하는 조형물로 문방사우 중 붓을 형상화했다. 펜으로 스케치 하고 수채물감 단색으로 그렸다. 인사성하는 인사동의 한여름이라는 뜻. 얼마전에 뮤즐님이 만들어서 선물해 주신 낙관을 찍었다. ⓒ 오창환
요즘처럼 덥거나 비가 오면 야외 스케치가 어렵다. 어반스케쳐스고양은 이럴 때를 대비해서 실내에서 하는 특강을 마련했다. 박인홍 작가님은 유명한 어반스케쳐이며 특히 수채화를 잘 그리신다.
수업은 보통 작가님들이 시연을 하고 학생들이 그 그림을 똑같이 그리게 되는데 시연할 때 꼭 나오는 질문이 있다.
"선생님이 쓰시는 만년필 어디 거예요?"
"아 이거요? 이거 다이소에서 3000원 주고 샀어요."
"선생님이 쓰시는 물감은 뭐예요?"
"물감이 여러 종류가 있긴 하지만 신한 물감이 익숙해서 그거 제일 많이 써요."
신한 물감은 입문자들이 많이 쓰는 가장 대중적인 물감이다. 특별한 화구를 기대했던 우리로서는 조금 실망이다.
박인홍 작가님처럼 펜이나 물감을 별로 가리지 않고 잘 그리는 분들도 많다. 반대로 그림 도구를 많이 따지는 분들도 있는데, 나는 펜에 집착하는 편이다. 내 손에 딱 맞는 펜을 구하려는 마음이 마치 옛날 장수들이 손에 맞는 보검을 구하려 천하를 돌아다녔던 심정과 같다고나 할까.
나의 도구들
▲ 카키모리 펜촉과 나미키 팔콘 만년필을 그려서 실물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카키모리 펜을 사용해서 그렸다. ⓒ 오창환
얼마 전에도 카키모리(일본의 문구 제작사)에서 나온 펜촉을 샀다. 잉크를 찍어서 쓰는 딥펜 펜촉인데 특이하게도 작은 총알처럼 생겼고 가는 홈이 파여서 거기서 잉크가 흘러나온다. 언듯 보면 도저히 그림을 그릴 수 없을 것 같은데 막상 써보니까 섬세한 표현도 가능하고 굵기를 달리하면서 사용하는 것도 가능하다. 쓰면 쓸수록 손에 착착 달라붙는 게 드디어 내가 찾던 보검을 찾은 것 같다. 펜촉 하나에 5만 원이면 비싼 건데도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나미키 사의 팔콘(falcon)이라는 만년필도 해외 직구로 구입했다. 팔콘이 매(조류)라는 뜻이듯이 이 만년필은 펜촉이 새의 부리처럼 특이하게 생겼다. 이 만년필은 펜촉이 낭창낭창한 연성 펜이다. 그림 그리는 필압을 조정하면 선의 굵기를 조절할 수 있다. 아직 손에 익지 않아서인지 좀 어색한데, 만년필이 어떤지는 좀 더 친해지고 나서 볼일이다.
우리 조상님들도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릴 때 가장 중요한 도구인 지필묵연(紙筆墨硯) 즉 종이, 붓, 먹, 벼루를 문방사우(文房四友)라고 하여 애지중지하셨다. 도구를 의인화하여 친구라고 말한다는 자체가 그 도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말해준다. 현대의 어반스케쳐들도 문방사우에 해당하는 화구들을 사용하고 있는데, 붓은 펜, 먹은 물감, 벼루는 팔레트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고 화선지는 수채화 종이가 되었다.
원래 덕후들이란 끝을 모르는 사람들이고 친구와 헤어질 결심을 하기는 쉽지 않다. 조선 후기의 유명한 문신 유재(游齋) 이현석(1647~1703)은 자신이 애장하던 붓이 닳아서 못쓰게 되자 장례를 치르고 무덤까지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이를 필총(筆塚, 붓 무덤)이라 칭한다.
조선 최고의 에세이스트이자 실학자였던 이덕무(1741~1793)는 붓 무덤 곁에 파초를 심어 붓의 혼을 달랬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 시대에 파초는 남방에서 수입한 화초로 기르기가 매우 까다로워서 부를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당시로는 제대로 플렉스를 한 것이니, 요즘으로 치면 자신이 쓰던 만년필이 못쓰게 되자 명품 가방에 넣어서 묻어주는 것과 같다. 2019년에 출간된 <문장의 온도>는 이덕무의 글을 번역한 책이다.
수채화는 종이의 질이 중요해
저렴한 펜도 무방하다는 사람들도 이구동성으로 종이만은 좋은 것을 써야 한다고 한다. 펜 그림이나 색연필 그림은 종이 품질에 큰 영향을 받지 않는다. 하지만 물을 많이 사용하는 수채화의 경우에는 종이가 매우 중요하고 품질이 나쁜 종이로는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없다. 20매짜리 수채화 종이 몇 권 주문하면 10만 원이 훌쩍 넘어간다. 조심해서 아껴 써야 한다.
종이를 1평방미터(m²) 깔아놓고 그 무게를 표시하면 그 종이가 얼마나 두꺼운지 알 수 있다. 크로키나 스케치는 90그램이나 120그램 사용해도 괜찮다. 색연필 그림 등 간단한 그림은 200그램 짜리도 많이 쓴다. 수채화를 하려면 300그램 이상의 종이를 사용해야 종이가 울지 않고 작품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종이를 묶음으로 사면 표지에 종이의 무게가 나타나 있다.
수채화 종이는 물을 머금을 수 있게 표면에 울퉁불퉁한 요철이 있는데 그 요철의 상태에 따라서 분류하기도 한다. 종이를 만들 때 프레스로 누르게 되는데 뜨거운 상태에서 프레스로 누른 종이를 '핫 프레스트(hot pressed)'라고 하는데 입자가 작고 섬세해서 세밀한 그림을 그릴 때 좋다.
차가운 상태에서 프레스를 불러서 종이를 만들 경우는 '콜드 프레스트(cold pressed)'라고 하고 이 종이는 중간 정도의 성질을 갖는다. 프레스를 하지 않는 종이는 입자가 거칠기 때문에 '러프(rough)'라고 한다.
서양에서는 종이 만드는 과정에 주목했다면, 동양에서는 종이의 상태로 이름을 지었다. 핫 프레스트 종이는 가늘 세 자를 써서 세목(細目)이라고 하고, 콜드 프레스트는 중간 정도 성질이기 때문에 중목(中目)이라고 하고, 러프는 거칠 황 자를 써서 황목(荒目)이라고 한다. 한자로 눈 목(目) 자에는 그물코라는 뜻이 있다. 눈 목자를 겹쳐서 보면 그물망처럼 보이는데 그 형상을 따라서 눈 목자에 그물코라는 뜻이 추가된 듯하다.
이런 용어는 부르기도 좋지만 직관적으로 종이의 상태를 알 수 있어서 좋다. 종이를 묶음으로 사면 표지에 종이의 상태가 영어로 표기되어 있다.
염불 보다는 잿밥에 관심이 더 많은 사람도 있게 마련이다. 음악보다 오디오를 더 사랑하는 사람도 있다. 그림도 좋지만 그림 도구도 좋다. 그림 도구를 사랑하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문방사우 이야기가 나온 김에 오랜만에 인사동에 가서 거대한 붓 조형물 '일 획을 긋다'(윤영석 작)를 그렸다.
▲ 인사동 입구에 있는 이 붓 조형물은 크기로 보나 형태로 보나 상당한 존재감을 뿜어낸다. ⓒ 오창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