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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꽃 사세요! 퇴사 직원의 세일즈

아롱다롱 오피스텔링_회사생활 추억한다.

by 은수자

그녀는 느린 걸로 유명했다. 좋게 말하면 느긋하고 여유가 있는 거고, 나쁘게 말하면 느리고 게으르다는 평판. 특히 그녀의 바로 위 사수는 그녀의 성격이나 일처리 속도를 무척 못마땅해했는데, 보고 있으면 너무 속 터진다는 얘기였다. 나는 그녀의 사수와 매우 친하게 지냈는데, 그는 늘 자기 부하인 그녀에 대한 험담을 달고 살았다.


"아 글쎄, 코 앞에 우체국 한번 갔다 오는 데 한 시간이 걸리고"

"주말에 산행 갔다가 발목 삐끗했다며, 그 주 내내 회사 와서 거의 아무 일도 안 하고"

"은행업무 보러 한 번 가면 2~3시간은 기본이라니까"

"하물며 탕비실에 한번 가도 커피 먹고 혼자 20~30분은 이어폰 꽂고 음악을 듣다 자리에 온다니까"

"워크숍 가서 자기는 몸 약해서 아무것도 못한다며 휴지 하나 안 치우더라니까!"



그녀는 매우 왜소하고 말투도 약간 느리긴 했지만 내가 보기엔 그 사수와만 특별히 사이가 나빴을 뿐, 다른 분들과는 크게 트러블이 없었고 (아마, 업무상 엮이지 않아서이기도 했겠지만), 특히 대표님은 그녀를 총애하는 편이었다. 어른들이 좋아할 만큼 순한 성격, 순한 외모, 늘 웃는 얼굴의 인사성, 그런 것들이 어필했다.

그녀의 업무는 인사총무팀의 "전적으로 총무/잔일"의 전담반 같은 것이어서, 회사 각 부서의 DHL 수발송, 각종 중요서류의 우체국 발송, 업체들에게 보내는 단순 공문 작성, 회사의 비품관리 및 구매, 근태 장부 정리, 4대 보험 공단 관련 단순 신고 업무 정도의 가벼운 것들이었다.

그럼에도 그녀의 사수는 늘 그녀가 답답하다고 한탄했고, 다시는 기혼 여직원을 안 뽑겠다는 어이없는 멘트까지 했다. 지금도 저런데 아이라도 생기면 그냥 퇴사하고 전업주부로 살았으면 좋겠다고 하면서.

그때 그녀는 이십 대 후반의, 1년 차쯤 되는 신혼부부였다. 아직 아이는 없는.



그러던 그녀가 어느 날 조용히 퇴사를 하겠다고 말했다. 우리는 모두 몸이 약해 보이는 그녀가 이제 아이를 가지려 임신준비 때문에 그러겠거니 했다. 하지만, 그녀는 가볍게 웃기만 할 뿐, 끝내 퇴사 이유를 말하지 않고 회사를 떠났다. 마지막 날, 그녀의 사수는 평소와는 다르게 송별회를 멋지게 해 주며 그녀의 앞날을 축하했다. 개인적인 기분과 감정이 다분히 들어가 있던 그날의 모습, 그녀와의 이별이 너무 좋았던 게다.


아마 마음속으로는, 새로운 직원은 "빠릿빠릿하고 눈치와 센스를 겸비" 한 미혼 직원으로 뽑아야지 결의를 다졌을지 모른다. 너무 신난 모습으로 강산애의 노래를 열창하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흐르는 강물도 거꾸로 거슬러 오를 수 있는 에너지 넘치는 새 직원을 열망했었을까.



그렇게 한 반년쯤 지났을 때였나, 대표님으로부터 흥미로운 얘기를 들었다. 그녀가 오늘 회사에 놀러 오겠다고 했다면서 다들 함께 점심이라도 같이 먹으라고. 회사에 크게 친한 직원도 없었고, 딱히 그녀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도 없는데, 퇴사한 회사에 놀러 온다는 일이 참 의아했지만, 정말 그녀는 근 반년만에 회사에 나타났다. 그녀도 직원들도 모두 어색한 웃음으로 인사를 하고, 우리는 그녀 손에 들린 두꺼운 홍보물에 눈이 갔다.


'아, 무언가를 팔러 왔구나! ' 우리 모두는 직감했다.


그녀는 마치 옛 친정집에 온 듯 자연스럽게 탕비실에 가서 차를 한잔 타서 마시고, 회의실 의자에 앉아 자기가 갖고 온 홍보물들을 조금씩 정리하는 것 같았다. 그녀와 사이가 안 좋았던 사수는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고, 그저 다른 직원들 뒤에서 그녀와 가벼운 목례를 했을 뿐이었다.


꽃 주문 이제 저희 가게로 해 주세요,
회사 경조사 거래처 화초/꽃 선물 많이 보내시잖아요.
다 저희 가게로 몰아주세요.
대표님께도 따로 다 부탁해 뒀어요.

아마 대표님은 그녀의 방문목적을 사전에 들으셨지만 불편해서 그 얘기는 없이 그냥 직원들에게 점심을 함께 하라고만 하시고 나가신 것 같았다. 거래처 꽃주문..... 그것은 그녀와 가장 사이가 나빴던 그 사수의 권한, 인사총무팀 팀장의 권한 아닌가? 가장 불편했던 옛 상사에게, 대표님과의 전화 한 통을 근거로 들이밀며 그녀는 꽃집 영업을 하러 온 것이었다. 알고 보니, 그녀의 남편은 경기도 외곽에서 화훼매장을 하는 분이었고, 결혼하면서 이제 본격적으로 그녀는 남편과 함께 매장일을 돕게 된 것이었다. 오늘은 영업사원으로 옛 직장을 찾아온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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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얘기를 듣던 그 사수는 깜짝 놀라 손사래를 쳤다.


"지금 거래하는 꽃집이 우리 회사와 근 20년이 넘은 집이야. 하루아침에 그런 거래처를 끊어내고 OO 씨 남편 매장으로 바꿔 줄 수는 없어. 그 사장님이 우리 사무실 화초도 주기적으로 와서 다 관리하고 봐주시고, 늘 꽃도 제일 좋은 걸로만 보내준다고. 안 돼요! 못 바꿔."


"대표님께 부탁드렸어요. 다는 아니라도, 처음엔 일부 주셨다가 저희가 잘하면 점점 늘려주세요."


늘 소심했던 그녀는 이제 당찬 영업사원이 되어서 나타났다.

옛 사수 앞에서도 전혀 기죽지 않고, 본인의 영업목적을 분명히 말하며 대화를 밀고 나갔다.

거절 앞에서도 크게 개의치 않고, 이제는 남편의 제1 영업사원으로서 에너지를 제대로 발휘했다.


그녀가 두고 간 것은 수백 장의 꽃집 광고 책받침, 프리미엄을 주고 샀을 법한 심플하고 명료한 매장 전화번호가 찍힌 명함 2통, 꽃집 소개가 담긴 브로셔, 몇 개의 소형 화분 사은품.



외근에서 돌아오신 대표님은 그걸 보시더니, 해당 사수를 불러 조금씩 영업을 도와주라고 하셨고, 그 이후로는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매장으로 약간의 화분 주문이 나갔다. 그녀의 남편은 기존 거래처와 경쟁이라도 하듯이, 자기 와이프 옛 직장인 우리 사무실에 정기적으로 나타나 화분의 상태를 봐주며 관리해주곤 했다.

그녀도 주기적으로 간식을 사들고 회사에 주기적으로 나타나 '새 영업처가 된 옛 직장'을 관리했다.

당시엔 보험사나 은행, 선사나 포워더, 통관사, DHL/FEDEX 같은 특송사의 영업사원들이 꾸준히 회사를 방문하던 시절이었고, 여기에 '꽃집' 영업사원이 하나 추가된 셈이었다.


직원들은 처음 그녀가 다시 등장했을 때 불편해하더니,
시간이 지나자 다들 '더 불편해했다'.

하지만 대표님의 '묵인'을 등에 없고 당당히 회사에 드나드는 그녀를 누구도 뭐라 막을 길은 없었다.


이후, 그녀의 후임으로 새로 입사한 "빠릿빠릿한" 새 직원이 그 사수에게 물었다.

"가끔 오시는 그 여자분 누구세요? 꽃집 사장님이 여길 왜 그렇게 자주 오세요?

그 사수가 답했다.

예전에 근무했던 이상한 여직원,
지금은 꽃집 한다고 영업 오는 더 이상한 여직원!


아하........ 아하...... 새 직원은 한동안 아무 말도 덧붙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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