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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얄미운 상사의 번역료 꼼수

아롱다롱 오피스텔링_회사생활 추억한다.

by 은수자

그는 임원이었다. 나는 그가 그냥 얄미웠다. 아내가 초등학교 교사라는 그는 매우 장거리 통근을 하고 있었는데, 아내 사랑이 얼마나 극진한지 장거리 통근을 하는 본인은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코앞으로 통근하는 아내에게 차를 내주고 있다고 했다.


업무로 크게 연결되는 일이 없었는데도 그가 얄밉고 싫었던 건 특유의 너무 깍쟁이같은 인색함 ? 그런 느낌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는 본인이 근무했던 대기업에 대한 자부심이 정말 대단했는데, 누가 들으면 오너의 특수관계인인 줄 오해할 정도였다. 그는 유난스럽도록 깔끔해서 그의 책상은 여러 직원들의 입에 오르내릴 정도로 정말 완벽히 깨끗했고 대표님과도 매우 사이가 좋은 걸로 봐서, 업무성과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는 가끔씩 우리 팀으로 내려와 농담도 하고, 나름 신중한 충고들도 해 주며 특정 직원들과 친하게 지냈고,

내게도 늘 어느 선만큼은 친절하고 예의 있게 대해줬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영문 원고를 하나 들고 나를 찾아왔다.


아내의 대학원 숙제인데, 육아와 일에 공부까지 병행하는 아내가 너무 힘들어해서 그 영문과제를 내게 갖고 왔고, 번역료를 줄 테니 번역을 깔끔하게 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나는 세상에서 제일 하기 싫은 일 중의 하나가 번역이었다. 업무상 하는 수많은 '강제 영문 독해'야 어쩔 수 없지만, 업무 외로 하게 되는 번역일은 정말 반갑지 않았다.


마침 우리 팀에 영국에서 유학한 경력이 있는 신입 남자직원이 있어서 그를 소개했더니, 신입사원인 그가 불편하다며 극구 내게 그 번역일 부탁했다.

번역료 약속5.jpg


원고를 보니 아동심리학과의 집단놀이와 토론방법에 관한 논문의 한 부분 같았다. 분량이 크게 길지는 않아서 정말 내키지 않았지만 해드리겠다고 했고, 번역료를 시중 에이전시 요율에 맞춰 10만 원으로 오퍼 했다.


그는 흔쾌히 오케이 했고, 나는 해당 번역물을 희망기일에 맞춰 완료해 갖다 드렸다.


며칠 후, 그는 아내가 번역물을 보고 매우 흡족해했다면서 내게 번역료 봉투를 건네어주었는데, 열어보니 현금이 아니고 구두 상품권이었다. 나는 예의 있게 거절하며, 현금으로 다시 번역료를 정산해 주실 것을 요청했다. 현금과 상품권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은 오리지널 약속에 대한 것이라 지켜지는 게 서로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해서였다.


그는 내 말이 마치 농담인양 웃으며 무시하려 들었다. 현금이나 상품권이나 다 같지 않냐며.

아마도 그 상품권은 교사인 아내가 스승의 날쯤 받은 여러 개의 상품권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본인은 필요하지 않아 그냥 갖고 있었던 별로 소중하지 않았던 상품권.


정말 우스꽝스럽지만, 그 상품권과 관련하여 그 상사와 꽤 실랑이를 했고, 그는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으며 현금을 고집하는 내게, 결국 할 수 없다면서 정말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현금으로 10만 원을 주었다.

너무 하는 거 아니냐는 표정, 정말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아, 너무 얄미웠던 그 상사 (웃음)
그 일로 번역일이 나는 더더욱 싫어졌고 그 상사도 더 싫어졌다.


지금은 기억에 아주 희미하긴 한데, 그 번역의 내용 중에 이런 게 있었던 것 같다.

마치 눈을 가리고 하는 수건 돌리기 놀이처럼, 여러 명의 토론에서 지속적으로 이상한 결론이 계속 도출되는 경우, 그 원인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어디에서 누가 잘못된 데이터를 계속 input 하는 지를 어떻게 찾아야 하는 걸까 그런 비슷한 내용이 있었던 것 같다.


현금 10만 원으로 input 된 약속이 왜 갑자기 당연하다는 듯이 상품권 10만 원권 output으로 변환되었는지 알 수 없던 그날의 대화. 그렇게 그의 모습은 그가 준 원고의 내용처럼, '잘못 입력된 값'처럼 한동안 내 마음속에서 혼란스럽게 흔들렸다.

번역료 약속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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