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단톡 방을 통해 막 그 기별을 전해 받은 것은 늦은 점심식사를 마치고 막 양치를 하기 위해 화장실로 들어서려던 시간이었다.
"대박……. 1등 했어."
집사람이 전해 온 짧은 문장은 단지 그렇게만 적혀있었다.
2016년 5월 ‘이집트 카이로’ 지역 예선에서 1위를 한 이후 6월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개최된 ‘통일염원 역사 도전 골든벨 대회’ 유럽. 아프리카. 중동지역 최종 결선 전에서 아들이 우승을 했다는 소식을 집사람이 급하게 전해 온 것이었다.
집사람으로부터 아들이 이집트 카이로에서 열리는 도전 골든벨 예선에 참가를 신청하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처음 전해 들었을 때만 해도 “뭐 그런 행사도 하는 건가 보다” 싶을 정도로 대수롭지 않게 흘려듣고 말았다. “이집트 카이로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 고등학생들 여럿을 모아 두고 퀴즈대회라도 하려는가 보군” 정도로 여기지 않았는가 싶다. 그 근간에는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와 내내 휴대폰 화면만 들여다보고 있다는 집사람의 하소연을 익히 들어오고 있었기에 아들에 대한 나의 어떤 기대감이 무의식적으로 한껏 낮추어져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었다.
2009년 12월 초순경 한국에 있던 집사람에게 이집트 카이로에서 아이들 학교를 보내 보는 건 어떨까 하고 넌지시 물었었다. 당시 리비아 모처의 주택공사 현장에서 나는 함께 현장근무를 하고 있던 옆 부서의 동료직원으로부터 이집트에서의 아이들 교육여건이 그다지 나쁘지 않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집사람에게 나의 생각을 전했던 것이다.
뜬금없는 내 제안을 쉽사리 결정하지 못하던 아내의 동의를 얻어 회사에서 내 준 휴가기간 중 가족들을 이집트 카이로로 불러 현지 여건 등을 알아볼 요량으로 우선 답사를 해 보기로 하였다. 현지에서 외국인이 겪어야 할 생활여건과 다른 한국인 학생들이 겪는 학교생활 등을 우리 부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대학에서 아랍어를 전공하고 북아프리카 리비아에서 해외 근무를 해 오던 내게 ‘아랍어’라는 낯 선 이방의 언어는 한 살이라도 더 어린 나이에 학습을 시작하는 것이 유리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했고 아이들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조금 더 넓혀 주는 건 어떨까 싶은 생각은 이전부터 내 마음속 한구석에 자리 잡아 왔던 것이었는데 때마침 회사 동료가 이집트 카이로에서 20여 년간 거주해 왔던 터라 요모조모 관련된 이야기를 그에게서 전해 듣고는 집사람에게 이집트 답사 제안을 하게 된 것이었다.
한국과는 확연히 다른 이집트 카이로의 모습에 현지 도착 직후부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대었던 아내는 답사 마지막 날을 하루 남기고도 쉽사리 동의를 하지 못하다가 두 아이를 현지 한국학교에 보내고 있는 교민 아주머니 한 분과 한인교회 목사님 부부를 만나 함께 점심식사를 하면서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 아주머니 가족 또한 가장분이 사우디아라비아 현장에서 근무를 하면서 아이들 둘을 카이로 한국학교에 보내고 있었기에 우리 가족과 그 가족의 처지가 얼핏 비슷해 보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목사님 부부의 추천 또한 한몫을 크게 하였다. 물론 한국보다 낯설고 힘든 일도 당연히 많지만 영어를 비롯한 여러 외국어를 학교 수업시간에 배울 수 있고 외국인 친구들을 사귀기 쉬운 등 한국에서 같은 또래 아이들이 경험해 보기 힘든 다양한 경험 또한 접하기 쉬운 환경이라는 그들의 의견에 집사람과 내가 귀를 좀 더 기울이게 된 것이다.
해가 바뀌어 2010년이 되자 아내는 하나둘씩 한국 집에서의 짐을 정리하고는 3월에 아이들 둘을 데리고 훌쩍 이집트 카이로로 이사를 했다. 당시 리비아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던 나는 아내 혼자 끙끙거리며 생활의 거처를 온전히 이역만리 이집트 카이로로 옮기는 과정을 단지 전해 듣기만 하는 입장이었다. “아이들 전학과정을 마치고 짐을 싸서 배편으로 부치고 하는 그 과정들이 살림만 했던 아내에게는 결코 쉽지 않은 과정이었으리라” 하는 생각을 했지만 실제로 나중 집사람에게서 전해 들은 그 모든 과정은 내가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보다 더 힘든 시간이었다.
2010년 3월 10일경 이집트 카이로에 도착한 집사람과 아이들은 카이로 ‘마아디’에 집을 구하고 신도시 지역인 ‘뉴 카이로’ 지역에 소재한 ‘카이로 한국학교’에 각각 5학년과 3학년 과정으로 등록을 마쳤다. 간간이 집사람은 그 과정들을 메신저나 전화통화로 내게 전해 주었다. 아이들 학교생활은 어떠하며 새롭게 배우게 되는 과목들은 어떠한 게 있는지 그리고 이웃의 누구누구와 새로 친구가 되었다는 이야기들을 저녁시간 동안 서로 주고받았다.
총 6년 과정으로 한국 교육부에 정식인가 된 카이로 한국학교에서는 아랍어, 풍물놀이, 영어, 태권도 수업 등이 있다든지 같은 반 아이들과 학교에서 한 날엔 ‘오버 슬립’을 했고 ‘핼러윈 데이‘ 때는 아이들이 어떤 분장을 했는지 그리고 인근의 홍해 바닷가로 소풍을 다녀왔다 하는 이야기였다.
그 당시를 돌이켜 보자면 꼭 우리 가족에게 새로운 생활의 설렘만이 가득했던 것은 아니었다. 아이들의 자발적인 의사라기보다는 온전히 나와 집사람의 갑작스러운 선택으로 인해 전혀 새로운 환경에 적응을 해야 했던 어린아이들에게 그 모든 과정이 낯설고 어려운 시간이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가장으로서 함께 그 모든 과정을 함께 해 주지 못한다는 생각에 항상 마음 한구석이 무거웠다. 그러다가 여름휴가를 내어 처음 이집트 카이로의 가족들을 만났을 때 나름 잘 적응하고 지내는 듯 보이는 집사람과 아이들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내심 안도하고 있는 나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기도 했던 시간이었다.
2011년 연초에는 뜻밖에도 이웃나라 튀니지에서부터 시작한 ‘아랍의 봄’과 함께 리비아와 이집트에도 그 거센 여파가 들이닥쳤다. 리비아에 있던 나는 리비아 내전 발발과 함께 리비아 한국대사관에서 마련해 준 전세기 편을 통해 리비아의 내 거처를 이집트 카이로로 옮기게 되었고 이집트 혁명으로 인해 한국으로 임시대피를 해 있던 가족들은 약 한 달여를 한국에서 지낸 후 이집트 상황이 다소 안정화되는 징후를 확인하면서 카이로로 다시 돌아와 아이들 학교생활을 계속 이어갈 수 있었다.
한편 2011년 여름에 집사람과 나는 6학년 2학기가 되는 아들을 ‘초이팟 인터내셔널 스쿨(Choueifat International School)’이라는 카이로 소재의 국제학교로 전학을 시켜야만 했다. 카이로에 소재한 한국학교는 중등과정 이상이 없기 때문에 9월에 신학기가 시작하는 국제학교의 교과과정에 맞추어 아들을 6학년으로 편입시켜야만 했던 것이다.
우리 가족이 거주하고 있던 카이로 마아디 지역의 집에서 통학버스를 타고 매일 아침 6시 30분에 학교로 출발하는 아들을 지켜보면서 집사람과 나는 많은 걱정을 서로 나누어야 했다. 당시 여러 가지 우려가 있었겠지만 그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것은 오로지 우리 어른들만의 걱정거리들이었다. “모든 학교 수업이 영어로 진행이 될 텐데 수업 내용을 잘 이해할 수는 있을는지 그리고 대부분의 반 아이들이 이집트나 기타 외국 국적의 학생들 일 텐데 그들 하고도 잘 어울려 지낼 수 있을까” 하는 등의 지극히 정형적인 고민과 걱정들이었다.
처음, 바뀐 학교의 교복을 새로 구입해 입히고 아직도 채 어린 티를 벗어던지지 못하던 아들을 그 학교의 첫 수업에 들여보내었을 때는 집사람과 내 마음 한구석에 시큰한 안쓰러움을 느껴야만 했다. 부모 욕심으로 인해 어린것 마음고생만 시키는 게 아닌가 싶은 심정이었다. 시간이 조금조금씩 지나가면서 아침 일찍 일어나 학교 버스를 타서 오고 가는 일에도 아들은 나름 익숙해져 갔고 학교 시험에서도 곧잘 우등한 성적을 받아 오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그런 모습의 아들이 집사람과 내 눈에는 대견스럽게 보였다. 제 2 외국어로 선택했던 아랍어나 프랑스어 수업에서도 나름 큰 무리가 없이 잘 따라가는 듯 보였고 ‘한니발과 카르타고 전쟁 이야기’에 관심을 가진다거나 우리 부부가 생각해 보지도 못했던 여러 주제들에 대해서 불쑥 질문들을 꺼내어 보이던 아들의 모습은 집사람과 나에게 예측 못한 웃음을 이따금씩 선물해 주었다. 자연스럽게 둘째인 딸아이도 2013년 9월에 같은 학교 6학년으로 등록을 하면서 오누이가 옥신각신하며 함께 학교에 오고 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다.
그러다가 집사람의 잦은 푸념이 시작된 것은 아들의 키가 훌쩍 크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어느새 집사람보다 훌쩍 더 키가 커져버린 것은 물론이고 어쩌다 방학 기간 동안 한국에 몇 달 다녀오기라도 하면 보는 사람마다 "도대체 키가 몇이냐"하는 질문을 던지기 일쑤였다. 키가 커지면서 아들은 사춘기를 겪었고 목소리가 변성기에 접어 들어섰고 생각이 더 자라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문득 엄마에게 아이 취급받는 걸 거부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들이 자라 갈수록 아이가 아닌 남자를 키워 본 경험이 없던 집사람의 고민은 날로 깊어져 갔다.
카이로 커뮤니티 한인 교회에서 알게 된 또래의 남자아이들과 어울리기라도 하는 날이면 아들은 전화 한 통도 없이 밤의 카이로 거리에서 시간을 보냈다. 가뜩이나 치안이 예전만 못하다는 한국 교민들의 걱정이 계속 이어져 왔기에 집사람의 한숨은 점점 늘어갔고 아들은 엄마의 그러한 반응을 사뭇 못마땅한 간섭으로 여기는 듯했다. 아들의 '이유 없는 반항기'가 바야흐로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집트에서의 직장생활을 잠시 뒤로하고 ‘사우디아라비아 서부지역’ 호텔 신축 현장에 임시로 직장을 얻어 근무를 하고 있던 2016년 봄, 이집트 카이로 지역에 ‘민주평화통일 자문회의(민주평통)’ 주관 '2016 통일 도전 골든벨'이 처음 예고되면서 아들 또래 아이들이 의욕을 가지고 각자 준비를 한다는 소문을 전해 들은 집사람은 아들이 다른 아이들 마냥 집중력을 가지고 준비를 해 주지 않는 것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곧잘 학교 수업을 따라가는 편이었고 최우등생은 아니었지만 나름 우등한 성적표를 집으로 가져다주던 아들이었던 터라 그건 조금 노력을 더 해 주었으면 하는 보편적인 엄마의 마음이었으리라 짐작이 된다.
그런데 2016년 4월 9일 개최된 카이로 지역 ‘도전 골든벨’ 예선에서 아들은 1위를 차지하며 ‘유럽. 중동. 아프리카 지역’ 결선대회에 참가하는 자격을 획득했다.
그건 매우 뜻밖의 일이었고 기대를 가지고는 있었지만 사실 그 기대의 90프로 이상은 부모로서의 막연한 희망이었지 현실적으로 “아들이 다른 참가자들에 비해 우위에 있다” 하는 생각의 기반이 아니었기에 한편으론 무척 당혹스럽게도 여겨졌었다.
두 달 뒤인 6월 4일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열렸던 ‘중동. 아프리카. 유럽지역 결선’을 코앞에 두고 집사람은 혹시나 하는 기대감과 엄마로서 가지게 되는 당연한 마음 쓰임으로 “조금만 더 집중해서 준비를 해 주었으면” 했겠지만 그게 또 성에 차지 않았나 보다. 아들은 학교가 끝나면 휴대폰을 들고는 페이스북 화면을 들여다보았고 주말에는 또래 친구들과 어울리느라 여념이 없었다. 결선이 열리는 오스트리아 비엔나에는 각 지역의 예선을 1위로 당당히 통과한 쟁쟁한 실력자들이 잔뜩 몰려들 텐데 말이다.
아무튼 예정된 시간은 흘러갔고 비엔나로 출발하기 이틀 전 예측하지 않았던 큰 사단이 벌어졌다. 예약해 두었던 ‘카이로 출발’ ‘비엔나 도착’ 항공편이 이유 없이 취소된 것이었다. 빠듯한 일정에 맞추기 위해서는 불과 10시간 후에 카이로 공항을 출발하는 다른 항공편을 알아보아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새벽까지 대회 관계자에게 메신저를 보내고 호텔을 다시 알아보는 등 수선을 피워야만 했다. 꼭 이 대회에 참가해야만 하는 걸까 하는 회의가 몰려온 것도 사실이었지만 꼭 참가해 보고 싶다는 아들의 의견이 있었기에 그 모든 불편함을 감수해 보기로 하였다.
예정된 출발시각에서 세 시간 일찍 카이로 공항에 도착해서 항공편을 알아보고 새로 발급된 탑승 티켓을 받아 집사람과 아들이 비엔나 소재 지정된 호텔에 잘 도착을 했다는 기별을 받고 나서야 사우디아라비아에 있던 나는 겨우 마음을 놓았다. 하지만 그건 단지 대회가 열리는 장소에 무사히 도착을 한 것에 불과한 일이었지 정작 예선을 마치고 아프리카. 유럽. 중동 각 국가들에서 몰려온 쟁쟁한 실력자들과 이틀 뒤 대륙별 결선을 치르는 일과는 전혀 무관한 해프닝이었다. 분명히 그 전조가 밝지만은 않은 것이었다.
간간히 집사람에게서 기별이 오고 갔다. 대회에 참가한 학생들과 호텔 외부에서 식사를 함께 했고 어느 나라에서 몇 명이 참가를 했으며 대회가 열리는 장소의 분위기 등의 이모저모를 집사람이 나에게 전해 주었다. 그런 와중에 여전히 집사람은 아들에 대한 불평도 잊지 않았다. 밤늦게 까지 대회에 참가한 아이들과 밖에서 어울리다 들어와서는 영국에서 온 대표 학생과 또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했다. 바로 내일이 시합인데도 말이다.
대회 당일 아침 일찍 메시지를 몇 번 주고받다가 집사람으로부터의 기별이 뚝 끊어졌다. 본 대회가 시작되면서 집사람도 많이 긴장되고 걱정이 되었으리라 생각했다. 어쨌든 그것은 말 그대로 국제대회가 아니었나? 처음 아들이 국제학교로 적을 옮기던 날 아침 걱정스레 바라보고 있던 집사람과 나를 돌아다보며 손을 흔들어 보이던 아들의 모습이 불현듯 눈앞에 떠올랐다. 그리고 몇 시간 후 집사람의 메시지를 마침내 전해받은 것이다.
"대박……. 1등 했어……."
아들은 2016년 7월 서울에서 개최된 '통일염원 역사 도전 골든벨' 한국 최종대회에 ‘중동. 아프리카. 유럽지역’ 결선 1위 자격으로 참가를 했다. 부모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매번 걱정을 끼쳤던 아들이었지만 그 아이는 어쩌면 고대 페르시아 전쟁에서 마라톤 평원을 외롭게 질주했던 그리스 전령 '피이디피데스(Pheidippides)' 마냥 혼자만의 고독한 질주를 계속해 왔던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만 부모로서 단지 지켜보아야만 했고 그 아이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완주해 주기만을 바랐을 뿐이었다.
최종대회 참석을 위해 한국을 찾았던 아들은 대회 3일 전부터 합숙에 들어갔다. 임진각 통일 전망대를 방문했고 남산 타워와 전쟁 기념관 방문 등이 일정 내에 빽빽하게 채워져 있었다. 녹화 전날 KBS 방송국을 방문해 음악프로 녹화방송 견학하는 일을 마지막 일정으로 천안 독립기념관으로 내려가 다음날 치러질 '도전 골든벨'에서 각 대륙별 그리고 각 도별 한국 소재 고등학교 우승자들과 일전을 준비했다. 어린 나이에 얼마나 초조하고 또 한편으로 마음이 들떠 있었을까? 메신저를 통해 간간히 안부를 묻는 나에게 담담한 대답을 해 주었던 아들의 모습이 너무나 대견스러웠다.
집사람은 녹화 당일 새벽같이 일어 나 서울역에서 천안 가는 KTX 열차를 탔다. 하루 종일 걸리는 녹화 일정을 생각하면 아들도 아들이었지만 집사람도 다소 걱정이 되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기차 타기 전 지금 출발을 한다는 메시지를 보내왔길래 짤막하게나마 “격려 잘 해주라”는 말을 남겼다. 그리고 연락이 없어 궁금해하던 차에 마침 집사람으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문제가 너무 어려웠나 봐……”
초등학교 4학년을 마치고 이집트 카이로로 훌쩍 전학을 떠나야만 했던 아들에게 한국 근. 현대사를 주제로 치러진 '역사 도전 골든벨' 대회는 어쩌면 처음부터 너무 벅찬 레이스가 아니었을까? 스파르타의 청년들과 처음 칼끝을 겨누어 본 아테네 청년들이 느껴야 했던 어떤 보이지 않는 벽을 어쩌면 아들은 당시 한국 방문을 통해 느껴보지 않았을까? 다만 스파르타의 청년들이 배우지 못했던 그래서 놓쳐야만 했던 아테네 젊은이만의 그 어떤 가치와 품성 몇 가지 정도는 본인이 충분히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내 아들이 절대 잊지 않았으면 싶었다.
마침내 몇 개월 동안 부모에게 설렘을 가득 전해 주었던 아들의 숨 가쁜 레이스는 모두 끝이 났지만 주저앉고 싶을 때 그 어떤 유혹으로부터도 자신을 잘 지켜 내며 끝까지 완주를 했던 아들에게서 무한한 가능성과 부모 된 자로서의 자랑스러움을 느끼게 되었다.
‘도전 골든벨’이 끝나고 이집트 카이로로 다시 돌아온 아들은 2017년, 2018년 두 해 동안 고등학교 11학년, 12학년 과정을 마치고 지난 5월 17일 마지막 학교 시험을 치르고 나서는 상기된 표정으로 귀가를 했다. 초등학교 5학년 1학기에 이집트 카이로에 와서 8년 동안 통학을 해야만 했던 그 긴 시간들이 이제 막바지에 다다랐음을 아들은 그날 알고 있었으리라.
저녁상을 물리고 나서 집사람과 나는 아들을 한동안 대견해했지만 이제 아들은 대학 진학이라는 가보지 못했던 또 다른 길을 향해 내어 달려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고는 둘 다 잠시 숙연해져야 했다.
다음 날 시험이 있다고 하며 아랍어나 프랑스어 교과서를 앞에 두고 밤늦도록 끙끙거렸던 그 어린 아들이 자라서 이제 대학입시를 위해 A.P(Advanced Placement)나 아이엘츠(IELTS), SAT(Scholastic Assessment Test) 같은 어른들에게 조차 낯 선 명칭의 시험을 수차례나 치러야 했다. 한국의 학생들이 의례히 다니는 변변한 학원에 조차 보내지 못했는데 하는 부모로서의 미안함과 아쉬움에 방으로 들어서는 아들의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보아야 했다.
2018년 5월 19일 아침, 아들은 집을 나서는 동생 승희에게 “떨지 말고 침착하게 잘하고 오라”고 했다. 오는 7월 한국에서 개최되는 ‘2018년 역사 도전 골든벨’ 이집트 예선에 참가하는 동생을 오빠로서 격려해 준 것이다.
출제가 예상되는 문제들을 A4 종이로 수십 장을 정리해 두고는 몇 날 며칠을 끙끙거리고 있던 여동생이 자기 딴에는 무척이나 안쓰러웠던 것이다. 초등학교 2학년을 한국에서 마치고 줄곧 오빠와 같은 학교를 이집트에서 다녔던 둘째 승희에게 한문 투성이 용어가 난무하는 한국 근. 현대사의 얽히고설킨 이야기들이 좀처럼 눈에 들어오지는 않았을 것은 분명했다.
아침 아홉 시가 조금 넘어 대회가 열리는 ‘카이로 한국학교’로 출발하는 버스에 탑승을 한 둘째 아이는 엄마도 없이 대회 참석을 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함께 가지 않아도 된다며 새침하게 집을 나섰던 딸아이의 성화에 집사람은 차마 대회가 열리는 곳까지 함께 가 주지 못한 걸 미안해하면서 이따금씩 거실에 걸린 벽시계만 바라볼 뿐이었다.
“잘 하고 있을까?”
오후 열두 시 삼십 분이 조금 넘어서야 집사람에게 메시지 한통이 도착했다.
“정말 축하드립니다. 승희가 최우수상이네요.”
대회에 참석했던 이웃집 지인이 보내어 온 메시지였다. 메시지와 같이 시상식을 진행했던 사진도 몇 장인가를 함께 보내어 왔다. 최종 우승을 하지는 못했지만 탁구대 반만 한 크기의 대형 텔레비전을 부상으로 받은 승희의 모습은 다행으로 웃는 얼굴이었다.
내색을 하지는 않았지만 몇 날 며칠 예상문제들을 나름 정리해 두고 밤늦도록 끙끙거렸던 딸아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시상식 내내 싱글거렸을 승희는 오빠를 밖으로 불러내어 최우수상 시상으로 받은 대형 텔레비전을 오빠 손에 들리어 집으로 돌아와서는 엄마 얼굴을 보고 나서야 한참 참았던 눈물을 왈칵 터뜨려버렸다.
“아는 문제인데…… ‘나진. 하산’을 ‘나진. 선봉’이라고 써 버렸어……”
그런 딸아이의 등을 토닥거리며 집사람도 같이 두 눈에 눈물이 가득했다.
“아니야. 승희야. 정말 잘했어. 정말. 우리 딸……”
처음 이집트 카이로에 가자는 내 말에 아들은 “아빠! 이집트 사막에 가면 도마뱀도 볼 수 있죠? 한 번 가보고 싶어요.” 하고 대답했고 초등학교 2학년 딸아이는 “비행기 타고 몇 시간이나 가야 해요?” 하며 까르르 웃었다. 벌써 8년 전 이야기이다. 그 8년 동안 나와 집사람은 그 세월만큼 나이가 들어갔지만 아이들은 그 시간만큼 어른에 더 가까워졌다.
외출 후 집에 들어와서는 각자의 방문을 꼭 닫고 지내는 아이들이라 한편으로 서운하게 생각될 때도 많지만 우리 아이들이 단지 어른에만 가까워져 가는 것이 아니라 어른이 갖추어야 할 그에 알맞은 생각과 품성도 그들 속에서 함께 무르익어 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한편으로는 마음이 놓인다.
왜냐하면 아이들이 도전을 계속해야만 하는 진정한 ‘도전 골든벨’은 그들의 일상 속에서 여전히 진행 중임을 나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또 언제 저렇게 커 버렸던가? 하는 생각을 해 볼 때면 어릴 적 아이들에게 들려주었던 옛 노래의 한 소절이 생각나 가끔 남몰래 중얼거리려 본다.
“밀과 보리가 자란다. 밀과 보리가 자란다. 밀과 보리가 자라는 것은 누구든지 알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