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내게 자주 묻는 질문 몇 가지가 있었어.
"왜 대학에서 아랍어과를 선택하게 되었니?”
또는 이렇게도 물어보곤 했었지.
"도대체 왜 아랍어를 배울 생각을 했니?”
그런데 솔직히 말하자면 나 역시 그 적절한 대답을 지금까지 잘 찾지 못하겠어. 학교를 졸업한 지 벌써 20년이 지났는데도 말이야.
다만 확실한 건 고 3 때 진학 상담을 하고 있을 무렵에 큰누나가 내가 졸업한 대학교의 원서를 사 가지고 왔고 그 학교의 '아랍어과'에 내가 지원을 했다는 거야.
어디서 인가 아랍어를 사용하는 국가가 30개국 가까이 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거든.
그리고 당시 입학 경쟁률이 5.8대 1인가 정도였는데 운이 아주 좋았는지 덜컥 합격을 해서 우여곡절 끝에 포기하지 않고 졸업을 했을 뿐이라는 거야.
너무 맥 빠지는 대답 같지만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수학으로부터의 도피' 정도가 더 적당할 듯싶네. 적어도 아랍어과에서 수학책을 펼칠 일은 없을 테니까 말이지.
정말 수학책을 펼치지 않고 대학을 졸업했으니 어찌 보면 처음의 목적에 아주 합당했다고 해야 할까? 나 사실 학력고사 수학시험은 거의 다 찍었거든. 예전에는 수능을 ‘학력고사'라고 했었지.
각설하고 수학이 싫어서 아랍어과에 갔었던 건데 수학보다 더 무서운 녀석이 버티고 있었어. 그게 바로 ‘아랍어'라는 거였어.
아랍어 알파벳을 외워서 그럭저럭 모음 부호가 붙은 글은 읽을 줄 알게 되었는데 원래 아랍어는 대부분 출판물에서 모음 부호를 생략한다고 하는 거야. 모음 없이도 문자가 발음이 된다고 생각해?
얼마나 고역이었겠어. 아랍어를 가르치시던 교수님께서 말씀하셨어.
"자꾸 읽고 연습하다 보면 모음 부호 없이 글이 읽힌다.”
말이 쉬운 일이지. ‘자꾸’라는 표현이 주는 애매모호함도 이해가 잘 안되고 말이야. 요즘 수능 제2 외국어로 아랍어가 인기라고 하던데 아랍어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 이야기 좀 들어 봤으면 좋겠어. 아랍어 솔직히 어렵잖아?
동사는 또 왜 10형 까지 있고 단수, 쌍수, 복수에 남성형, 여성형은 또 뭐야…….
듣기만 해도 머리가 아프잖아? 그래서 어떻게 했을까? 아랍어가 아닌 한국어로 된 수업(중동역사, 아랍의 이해, 아랍사 등등)만 집중적으로 찾아서 듣다가 휴학하고 군대에 간 거지. 그런데 군대는 수학이나 아랍어를 두 개 다 합쳐 놓은 것보다 더 난해하더군. 내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었어.
30개월이라는 어마 어마한 시간을 군대에서 보내고 (사고를 치고 어디 조용히 들어가 있다 나온 게 아니라 그 당시 육군 30개월이었음) 2월 말에 전역해서 3월 초에 복학을 했으니 참 감회가 복잡하더라. 군대 끝나고 다시 '아랍어의 세계'로 들어섰으니 말이야.
어휴……. 또 팔자려니 했었지.
아무튼 마음 다잡고 학과 공부에 충실하려고 하던 그 시기에 그녀를 처음 보게 되었어. 이름이 ‘티나'라고 하는 여자 애였는데 그 이름의 뜻이‘무화과'라고 했던 것 같아. 어쨌든 예쁜 이름이라고 생각했지.
아라비아 왕국에서 교환 학생으로 2년간 우리 학교에 와 있었는데 내가 복학을 해서 보니까 이미 상당한 유명세를 타고 있더라. 얼굴이 굉장한 미인이었냐고?
글쎄……. 하긴 얼굴 덕분에 유명해 진건 부인할 수 없겠지. 항상 뒤집어쓰고 다녔으니까. ‘니깝'이라는 건데 아라비아 전통 여자 복장이지. 눈만 내어 놓고 얼굴 전체를 가리는 거 말이야.
여름 그 더운 날씨에도 좀처럼 벗질 않더군. 심지어 밥을 먹을 때도. 그냥 각자 상상에 맡길게. 어떻게 밥을 먹었는지 말이야.
어찌 되었건 아라비아 왕국 여학생이 무슨 사연으로 아랍어과 수업에 들어오게 된 건지는 알 수 없었고 개강하고 아랍어 회화 시간에 담당 교수님이 '티나'를 소개하시는 거야. 한국 사정에 익숙지 않으니 잘 지낼 수 있도록 관심을 가져 주라고 말이지.
그 애의 첫인상은 뭐랄까? 아직 어려서인지 눈 화장을 하지는 않았는데 눈 자체가 상당히 크더라. 쌍꺼풀도 진한 게 동양인들이 부러워할 만한 무척 아름다운 눈이었지. 왜 상상의 영역이라는 게 있잖아? 보이지 않아 더 관심이 가고 신비롭게 여겨지는 여자들만의 영역이랄까.
눈을 통해 유추해 보건대 상당한 미인이 아닐까 싶었어. 물론 그건 차츰 나중 관심을 두게 된 일이었고 복학을 하고 후배들이랑 수업을 함께 듣는 그 시간이 너무 새롭게 느껴지더군. 무척 긴장도 되고 말이지. 군대 가기 전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선배로서의 부담감 같은 게 마구 생기더라. 그래서 알게 모르게 무게 좀 잡으며 수업에 임하곤 했었지. 지금 생각해 보면 새파랗게 젊은 스물세 살짜리 남자가 말이지.
학교 도서관에 앉아 ‘아랍어 강독(Reading Arabic)'을 예습하려고 하는데 참 어렵더군. 단어도 생소한 데다 모음이 없으니 막무가내로 외워서 해결될 일은 절대 아니었지. 해서 이걸 누구한테 좀 물어봐야 하나 하고 있는데 마침 도서관 한 구석에 앉아 있는 티나를 보게 된 거야.
순간 조금 망설여지더라. 나는 걔를 아는데 그 애가 나를 잘 모를 테니 말이야. 그런데 내 얼굴을 보더니 티나가 눈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살짝 까딱거리며 나름 인사 비슷한 걸 내게 하는 거야. 솔직히 말하자면 감격스럽더라. 불과 한 달 전에는 군복을 입고 있었는데 이제 비로소 대학생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실감이 비로소 났던 거야.
그 애가 인사를 하니 나도 살짝 긴장이 풀려 손짓으로 잠시 나가서 얘기를 좀 나누자고 했지. 순순히 따라나서더군. 도서관 휴게실에 앉아 믹스커피 한 잔씩을 뽑아서 내 얘기를 조금 장황하게 늘어놓았어.
한국 남자는 군대에 가야 하는데 나는 무사히 마치고 다녀왔다. 아랍어 공부를 하고 싶은데 뭐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잘 안 되고 있다. 뭐 이런 얘기였어. 솔직히 얼굴만 가리고 있다 뿐이지 눈으로 생글거리며 사람 말을 잘 들어주는 표정이 여느 여학생들과 크게 다르지는 않더군.
그 날 이후 티나에게서 아랍어 공부 도움을 받게 되었어. 매일은 아니고 그 애가 시간이 나는 날이면 학교 매점이나 식당 한 구석에 함께 앉아서 ‘아랍어 읽기'와 '사전 찾는 법' 같은 걸 함께 연습했지. 처음 생소하게 여겨졌던 그녀의 복장도 자주 보다 버릇하니 익숙해지게 되었고 말이야.
물론 그 아이와 함께 있으면 뭇 학생들의 시선을 받는 일쯤은 감수를 해야만 했지. 확실히 원어민에게 도움을 받으니 실력이 많이 늘긴 늘었어. 모르는 단어도 사전을 보며 척척 찾아내게 되었고(아랍어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내는 게 은근히 어렵다면 믿을 수 있을까?) 모음 부호 없이도 글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게 되었지.
당시엔 인터넷 같은 매체가 없었을 때라 혼자 하는 공부에는 사실 한계가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전공 수업을 들어가는 일이 즐거움으로 변했다는 걸 느낄 수 있었지.
물론 그중 한 가지 이유로 티나와 함께 수업을 듣는다는 사실이 포함되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었겠지.
여름방학을 앞두고 방학 시작하면 한 달간 일본 여행을 하다가 돌아올 거라는 티나에게 밥을 한 번 사주겠다는 제안을 했어. 그동안 너무 신세만 졌는데 사례다운 사례를 한 번도 하지 못했었거든. 티나가 처음에는 손사래를 치며 사양을 하다가 결국 그러자고 하더라.
종로에서 만나 인사동 거리를 함께 둘러보고 대학로까지 걸어가서 저녁을 같이 하려는 생각으로 약속 장소인 종각역 앞에서 기다렸는데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 거야. 그렇게 연신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고 있는데 뒤에서 누가 내 어깨를 툭하고 치는 걸 느꼈어.
뒤를 돌아다보니 ‘와우~' 인형처럼 생긴 외국 여자애가 나를 보며 장난스럽게 웃고 있는 거야. 아담한 키에 컬이 들어 간 갈색의 긴 생머리를 하고 청바지에 꽃무늬 프린트가 새겨진 흰색 티를 입고 있었는데 나를 바라보며 이렇게 이야기하더군.
"푸르싸 싸이다……. 야 우스타즈? (만나서 반가워요……. 씨.)"
말속에 애교가 가득했는데 눈을 보니 그 아가씨가 티나라는 걸 바로 알겠더군. 그날따라 눈에도 색조화장을 했는지 눈이 더 커 보였지만 눈으로 전해지는 그 장난스러운 웃음이 티나라는걸 알게 했지.
어쨌든 이런 그녀의 모습을 처음 대하는지라 상당히 얼떨떨하더군. 나란히 인사동 거리를 걸으니 뭇 남성들과 여성들의 시선이 무척 따갑게 느껴지더라.
인사동에서 한복 모양을 한 책갈피 몇 개와 열쇠고리 몇 개를 사 들고 대학로 쪽으로 천천히 걸었는데 티나가 창경궁을 발견하고는 들어가 보고 싶다고 했어. 옛날 한국의 왕들은 어떤 곳에서 지냈는지 알고 싶다고 했던가? 아마.
두 사람 분 표를 끊고 들어가 여기저기 구경을 했는데 의외로 티나가 요목 조목 관심을 많이 보이더라. 나야……. 뭐 중학교 미술반 때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마다 와서 그림을 그렸던 곳 중에 하나라 조금 시큰둥했었지.
잠시 쉬어 갈까 싶어 창경궁 안쪽 큰 연못이라고 해야 하나 호수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 물가 쪽 벤치에 앉아 있는데 해가 뉘엿 지고 있었어.
초여름이라 7시가 조금 넘었었나?……. 그 전후였던 것 같은데. 저녁 석양의 붉은빛을 받아 티나의 얼굴이 더 화사하고 아름답게 보였지. 티나가 호수의 수면 위로 뛰어오르는 잉어들을 지켜보며 탄성을 지르는 모습이 참 앙증맞게 생각되더군. 말없이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 것도 뭐랄까 아무튼 참 좋더라.
고요한 적막을 깨고 티나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 건 십여 분이 훌쩍 지나서였어.
"저 사실은 도망쳐 나왔어요. 부모님이 미리 정해 둔 남자와 약혼을 해야 했거든요. 물론 결혼을 하고 한 가정을 이루며 사는 일도 하나님이 바라시는 일이지만 아직은 그럴 마음이 제게 생기지 않았어요. 지도를 펴 놓고 조금 멀리 가야지 한 게 바로 이곳이었어요. 다행히 주변에 아는 한국 간호사 언니가 있어 한국어와 한국에 대한 정보를 서로 주고받았죠. 며칠 전 엄마한테서 기별을 받았는데 아빠가 몸이 안 좋으셔서 이제 그만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아요. 그래서 가기 전에 한국이랑 일본 여행을 조금 해 두려고요. 나중을 다시 기약할 수 없으니까요.”
여기까지 이야기를 마친 후 티나의 커다란 두 눈에 눈물이 맺히는 걸 보았지. 뭔가 상세히 그 내막을 알 수는 없었지만 그간 마음고생이 상당히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어. 별다르게 내가 해 줄 말이 없더군.
노을이 살짝 내려앉은 호수의 수면 위로 잉어들이 펄쩍펄쩍 뛰어오르는 광경을 지켜보다가 대학로 어디쯤에 있던 창이 큰 식당에 마주 보고 앉아 함께 저녁을 먹고는 헤어졌었지. 즐거운 시간이었어. 티나는 애써 쾌활한 표정을 보이며 나를 배려해 주는 듯 보였어. 헤어지면서 악수도 서로 나누었던 것 같아. 아랍어 공부 열심히 하고 건강하라고 전하더군.
여름방학이 끝나고 첫 수업을 들어가서야 티나가 자신의 나라인 아라비아 왕국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어. 마음 한 구석이 뻥 뚫린 기분이 들더군. 수업 끝난 후 개강파티를 하니까 꼭 참석하라는 후배 과대표의 강권에 잠시 들렀다 가려고 방문한 학교 앞 호프집에서 앞에 앉은 여학생 하나가 나를 보더니 언뜻 새침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어.
"오빠는 티나가 오빠 좋아했던 거 몰랐죠? 1학기 첫 수업 시간에 오빠를 보고 나중 저한테 오빠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봤다고요. 도서관에도 일부러 오빠 앉은자리 근처에 앉곤 했었는데……. 남자는 다 바보 같은 구석이 있다니까. 여자는 원래 먼저 고백하는걸 잘 못한다고요."
그날 잠시 방문하려고 들렀던 개강파티에서 나는 만취를 하고 말았어. 어떻게 집으로 돌아갔는지 기억에 없었고 다음날 아침 내 방 침대에서 눈을 뜬 이후 몇 시간 동안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누워 있었지.
지난주 아라비아 왕국이 발주한 '자밀라 스마트 시티 2030 계획'에 대한 준비 작업 차 처음 아라비아 왕국의 수도인 자밀라 시티를 방문했어. 여태까지 아랍국가 이곳저곳을 방문해 보았지만 자밀라 시티만큼이나 깔끔하게 구획이 정리된 도시는 드물었지.
한국 대사관이 주최한 ‘한국. 아라비아 기업 친선 만찬회'에 회사 지사장과 동석한 자리에서 아라비아 왕국 현 국왕의 여동생이자 아라비아 왕국 상공회의소 의장과 인사를 나눌 기회가 생겼어. 세월이 무척이나 흘렀지만 나는 히잡을 단정하게 쓴 그녀가 '티나'라는 걸 바로 알 수 있었지.
"푸르싸 싸이다……. 야 라이싸…….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의장님..)”
하는 내 인사말에 나와 눈이 마주친 티나는 살짝 고개를 숙여 화답해 주었어.
"푸르싸 싸이다……. 야. 우스타즈.”
20여 년 전 여름날 오후, 그녀가 내게 보여 주었던 장난스러운 말투가 그 억양 속에 여전히 묻어 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