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es of Waves
큰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 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가라사대 내니 두려워 말라하신대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저희의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요한복음 6:18-21
글쎄요.
여학생들은 군대 제대하고 처음 학교 문을 다시 들어서는 남자 복학생들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요?
30개월 군생활을 마치고 주소지 관할 동사무소를 찾아 주민등록증을 갱신하고 대학교 학적과에 가서 복학 신청을 마치는 그런 하나하나의 과정이 설렘으로 다가오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2월 마지막 주 월요일 전역신고를 마치고 사단 보충대에서 의미 없는 하루 밤을 보낼 때에는 눈발이 날렸었지요. 부대를 떠나오던 날 갓 전입 온 이등병 한 명이 껌 한통을 야전상의 주머니에 푹 찔러 넣고 도망갔던 기억도 있네요.
3월 복학하고 첫 수업시간이 어떤 시간이었는지는 전혀 제 기억 속에 남아있지 않습니다만 복학하고 처음 조정부실을 찾았을 때의 그 적막감은 여전히 기억에서 잘 지워지지 않는군요. 퇴락한 가문의 아들 하나가 잃어버린 영지의 초입을 혼자서 서성이다 느끼는 쓸쓸함 같은 그런 걸 느꼈었죠.
대학교 신입생 당시에 조정부실은 선배들과 동기들로 늘 북적였어요. 혹 모임이라도 있는 날이면 앉을자리가 없어 신입생들은 뒤로 밀려나 주장과 선배들이 주고받던 대화를 무심결에 듣고만 있었지요. 그리고 여지없이 이어지던 술자리에서 선배들이 들려주던 화려한 무용담을 안주 삼아 두 눈을 반짝거리며 발갛게 술이 올라오던 그 시간은 또 얼마나 흥에 겨웠는지요?
중간고사 기간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흑석동 합숙소에 들어가 봄 합숙을 하던 당시에는 아침 운동을 마친 후 동기들 여럿이서 함께 등교하던 일이 얼마나 큰 즐거움이었는지 아마 아무도 모르실 거예요. 물론 그 학기의 중간고사는 온통 하얀 백지로 도배해야 했지만 말입니다.
여름방학 한 달여간 경기도 양수리에서 보냈던 합숙훈련은 또 얼마나 고됐는지 나중에 군대에 입대해서도 그 시간들이 주던 심리적 위안을 무시할 수 없더군요. 힘든 시간이었지만 또 뒤 돌아 생각해 보면 그리움의 앙금이 한 움큼 남는 그런 남자들의 세계였었죠.
그런데 제가 제대 후 찾은 조정부실은 너무 적막한 곳이 되어 있었어요. 사람들이 모두 떠나 가버린 김원중의 '바위섬' 같은 곳이 되어 있었죠. 전년도 주장을 했다는 동기 B에게 물어보니 뭔가 시작해 볼 엄두가 도저히 나지 않아 지난 2년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하더군요. 사람도 없고 장비도 없는 유령단체로 전락해 버린 조정부에서의 제 고민이 그때 막 시작된 것입니다.
이순신 장군에게는 배 열두 척이 남았었지요. 오합지졸이언정 조선 수군 또한 얼마가 있지 않았었나요? 그런데 제가 복학한 당시의 조정부는 사람도 배도 남아 있지 않았어요. 2년 전 한강 대홍수가 나서 배와 장비가 모두 떠내려 갔다는 이야기를 B로부터 전해 들었습니다. 얘기인 즉 자기도 뭔가 해 보려고 했는데 잘 안되더라는 이야기였죠.
교양학부 체육 교수님을 찾아가서 신입생 수업 시간에 조정부를 소개하는 시간을 5분만 달라고 해서 우선 신입생 유치에 나섰지만 잘 되지는 않더군요. 세대가 변해서 운동부가 잘 되지 않을 거라는 부정적인 이야기를 주변에서 너무 많이 들었어요. 당시 일본 영화 '으랏차차 스모부'라는 영화가 있었는데 참 그 내용이 제 이야기처럼 다가 오더군요. 아무튼 포스터를 만들어 붙이고 이런저런 시도를 참 많이도 했었답니다.
흑석동 대한 조정협회 정고에 가 보니 상황은 더 암담했지요. 반파된 배에 부착해야 할 장비는 모두 유실된 상황이었어요. 장비 수리와 제작을 위해서는 금전 지원을 받아야 할 형편인데 마땅히 지원을 부탁할 대상을 찾기가 힘들었어요. 2년간 활동이 없다 보니 학교에 지원을 요청할 근거도 미비했고 졸업생들과의 연결 고리도 썩 마땅치가 않을 때였죠.
더군다나 조정부 일에 신경을 쓰다 보니 제가 학과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는 시간이 늘어났고 결국 한시적 휴학이라는 결정을 내렸어요. 어찌 보면 순진한 듯 어리석은 결정이었죠. 집에서도 납득을 못하시는 눈치였습니다. 그런 와중에 복학한 과 동기들은 저를 보며 수군 댔다고 들었어요. 복학하고도 정신을 못 차리는 아이라고. 팔자 좋게 뱃놀이하는 아이라고.
그런데 년도가 바뀌면서 상황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죠. 몇 명이었지만 멤버를 구성해서 나름 '활동 포트폴리오'를 학교 측에 보여 줄 수 있어 장비 수리비의 일정액을 약속받았고 진심을 보이고 졸업생들과 접촉한 결과 학교에서 난색을 표했던 나머지 금액에 대한 지원도 받게 되었어요. 신입생 인적사항을 확보해서 신입생도 8명 정도 선발을 했으니 너무나 행복한 시간이었군요. 더군다나 그 해의 학교 달력에 제가 포함된 조정부 사진이 실렸고요. 어슴프레 자신감이 생겼답니다.
5월 달이 되어 학교 지원금과 졸업생 기금으로 장비를 보완하여 흑석동에서 시승식을 가졌었는데 당시 학생처장님이 학생처 직원들 모두를 동반하고 오셔서 직접 배를 타보셨고 그 해 봄 합숙 마지막 날 배와 장비를 학교로 옮겨와 장비 전시회를 가졌을 때는 총장님이 직접 오셔서 금일봉을 주고 가시기도 하셨죠. 그리고는 방명록에 이런 글도 남겨 주셨어요.
"O대의 혼이 여기에..."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사망했던 1994년 여름은 무척이나 더웠습니다. 8명이 노를 젓는 '에이트'팀을 만들어 미사리 조정경기장에서 합숙훈련을 했어요. 기술적인 부분을 보강하기 위해 국군 체육부대 (상무팀)까지 방문해 내무반에서 미팅을 가지기도 했었지요. 그 당시 힘든 합숙훈련 도중 도망가지 않고 잘 참아 주었던 신입생들에게는 정말 지금까지 고마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해 여름이 끝나갈 즈음 열렸던 2개의 전국 대회 (해군 참모총장배 대회. 서울 시장 배 대회)에서 경쟁 상대인 OO대 치대를 이기면서 결승선을 통과했을 때의 기쁨과 보람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답니다.
한 달여 전 10여 년 만에 만난 당시의 신입생 후배들과 한참 동안 이야기 꽃을 피웠어요. 제가 기억하지 못하는 부분들까지 온전히 기억을 해 내고 있던 그 아이들도 이제는 40대 중년의 사내들이 되어 있었습니다.
세상 나무 그늘의 안락함을 피해 태양을 향했던 그 아이들을 저는 '이카루스의 후예들'이라고 불러 주고 싶네요.
장비 전시회 한답시고 학교 분수대 앞에서 죽치고 있을 때 자리를 비우기가 마땅찮아 수업을 계속 못 들어갔는데... 바로 직전 결석한 수업의 담당 선생님이셨던 배혜경 선생님이 강의실에서 내려오시다 저를 보시곤 빙그레 웃으셨을 때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그 당시 배선생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O아... 괜찮아. 너는 그래도 뭐라도 한 가지 열심히 하고 있잖아..."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하늘을 향해 쏘아 올린 화살은 오래된 느티나무에 온전히 박혀 있었고 내가 불렀던 그 노래는 친구들 가슴속에 여전히 남아 있었네.
헨리 롱펠로우 - 화살과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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