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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했쟎아.

ONCE UPON A TIME IN GIRONA

by 오스만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로마서 4:20-22


기차가 막 출발하려고 할 때가 되어서야 선글라스가 매표소에 남겨진 사실을 알았다. 구입한 지는 꽤 되었지만 한참을 유용하게 사용했고 여전히 또 애착이 가는 물건이라 그 짧은 시간 동안 잠시 망설여야 했다. 붐비는 바르셀로나 '상츠' 기차역에서 주인 없는 선글라스가 온전히 남아 있을까 하는 마음과 기차가 곧 출발한다는 초조함이 서로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엉거주춤 자리를 찾아 앉자 기차가 천천히 역을 벗어나고 있었다. "허둥대고 있다."하는 생각이 잠시 스쳐 지나갔다. 십여분 남짓 두고 온 선글라스 생각으로 궁싯거리다 창 밖으로 시선을 돌리고 나서야 교외로 빠져나가고 있다는 호기심이 겨우 내 생각의 방향을 바꾸게 만들었다. 창에 비치는 내 모습 뒤로 스페인 '카탈루니아 주'의 풍경이 스쳐 지나가며 기차는 수차례 정차하다 달리기를 반복했고 1시간 30여분 만에 나는 '지로나'역에 도착했다.


지로나 역을 빠져나오는 시간에 봄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오후 3시가 조금 넘어가는 시간이었다. 거리는 우산을 받혀 든 사람들이 드문 드문 눈에 띄기도 했지만 비교적 한산해 보였다. 신호등 앞에서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며 비가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길게 내리는 비 같지는 않아 보였다. 바닥에서 튀어 오르는 빗물로 브라운색 구두가 조금 지저분해 보였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 종이 한 장을 꺼냈다. '호텔 카탈루니아 지로나'라고 예약 사항이 인쇄된 종이 뒷 장에는 전화번호 하나가 적혀 있었다. 휴대폰으로 지도 검색을 했다. 멀지 않은 곳이었다. 사거리를 두어 개 정도 건너자 호텔의 붉은색 입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어느새 비가 개어 있었고 파란색 하늘 위로 선명한 무지개가 보였다.


호텔 프런트에 앉아 종이에 적힌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가 꺼져 있다"는 메시지가 반복되어 안내되고 있었다. 프런트에서 줄곧 나를 바라보고 있던 금발의 아가씨에게 예약증과 여권을 맡기고 방 열쇠를 건네받았다.


'306호'

더블 침대 하나가 놓인 깨끗한 방이었고 통유리로 된 창을 통해 지로나의 오래된 성벽이 멀리 한눈에 들어왔다.


비에 젖은 손가방을 호텔 방에 남기고 거리로 다시 나서자 4월의 햇살이 눈부셨다. 기차역에 두고 온 선글라스 생각이 다시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정표가 이리저리 표시된 갈림길에서 좁은 골목으로 연결된 샛길을 발견해 내고 그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거리는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돌바닥으로 된 좁은 골목길에는 이상하게 사람들의 왕래가 드물었고 골목 중간중간에 자리 잡고 있던 쇼윈도 안에도 나른한 오후의 한산함이 들여다 보였다.


관광객으로 보이는 은발의 노부부가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며 내 앞을 걷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경사가 완만한 길 우측으로 성당이 하나 눈에 띄었고 그 노부부가 발걸음을 옮기는 방향으로 나 역시 생각 없이 성당의 출입구를 찾아들어섰다.


스테인드 글라스를 통해 실내로 들어온 햇살이 성당 안을 가득 채웠다. 여기저기 나무로 된 장의자에 앉아 기도를 하는 노인들 모습이 보였다. 출입구 가까운 의자에 앉아 나 역시 고개를 숙여 잠시 기도를 했다. 고요함 속에서 이따금 딸랑딸랑 거리는 종소리가 들려오는 기분을 느꼈다.


성당 앞에는 젊은 남. 녀가 돌계단에 앉아 사랑을 속삭이고 있었다. 행복한 표정이었다. 오래된 도시의 성벽으로 가는 방향을 모색하다 이정표 하나를 겨우 발견해 내고 그쪽으로 향했다. 시간은 오후 6시 15분 전이었다.


어느새 해가 지는 시간에 볼 수 있는 그림자들의 키가 훌쩍 커지고 있었다. 구불구불하게 연결된 골목의 어귀를 벗어나자 성벽의 입구가 보였고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한 무리의 학생들이 이리저리 발걸음을 옮겨 가며 카메라로 사진을 서로 찍어 주고 있었다.


성벽 위로 뻗어 올라가는 나무의 생명력이 눈에 띄었다. 겨울 한설을 버티고 봄의 새순을 무성하게 돋아내는 나무는 몇 해의 계절을 이렇게 지내었을까? 한 손으로 나무의 거친 몸통을 쓰다듬어 보았다. 왠지 따듯한 온기가 느껴졌다. 나무속에서 봄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성벽 위로 난 길은 매우 좁았다. 행여 마주 오는 사람을 만나기라도 하면 살짝 한쪽으로 길을 양보해야 할 듯한 느낌도 받게 되었다. 성벽에서 바라다 보이는 도시의 모습은 그리 크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낯 설지 않은 광경이었다.


조용한 도시였다. 마주치는 인적이 드물었고 군데군데 사람들의 움직임이 보이기라도 하면 왠지 시선이 그쪽을 향할 만큼 반가움이 느껴지기도 했다. 7시가 살짝 넘은 시간이었다.


사람들은 낯 선 동양인의 출현에도 좀처럼 관심을 두지 않았다. 저녁 어스름이 조심스럽게 내려앉는 도심의 거리를 지나며 사람들의 발걸음이 조금씩 빨라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하루를 정리하는 몸짓이었다. 지로나에 밤이 다가오고 있었다.


다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도심이 둘로 나뉘어 있었다. 수량이 많지 않아 보이던 다리 아래의 강물에 강변의 건물들이 하나 둘 켜지는 가로등 불빛에 비치는 풍경을 사진으로 남겨 봐야지 하는 생각이 들만큼 알록달록한 건물들의 반영이 아늑하게 여겨졌다.


호텔로 돌아온 시간은 오후 8시경이었다. 로비를 지나쳐 엘리베이터 앞에서 잠시 멈춰 서 있는 동안 프런트의 아가씨가 나를 불렀다. 그리고 편지봉투 하나를 내밀며 306호실 앞으로 남겨진 것이라 했다. 방으로 돌아와 봉투를 뜯어 안에 있는 종이를 꺼냈다. 그녀의 글씨였다.


지금 기다리고 있어요. 약속 했쟎아. 20년 전 4월 11일. 밤 9시. 광장 분수대.

Y.J


일주일 전 '+0034'로 시작되는 낯 선 전화번호 하나가 뒷장에 적힌 호텔 예약증을 우편으로 받아 들고 그것이 그녀에게서 온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전화번호 밑으로 그녀의 오래전 글씨체가 눈에 익었다.


"봄날의 분수대 광장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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