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아 산에서 생긴 일
어디서부터 이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전혀 고민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야. 아주 아주 오래전에 있었던 일인 데다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내 입 밖으로 꺼내 보지 않았던 이야기라 다소 두서가 없고 신빙성이 떨어져 보이지만 내가 내 귀로 듣고 내 눈으로 직접 본 이야기이니 온전히 믿어 주었으면 좋겠어.
그 해 겨울은 유독 서리가 많이 내렸어. 아침에 일어나 보면 집 앞을 둘러싼 바위산 위로 하얀 눈이 소복이 내린 것처럼 세상이 온통 은빛으로 반짝 거렸지. 부엌에서 빵을 굽고 계시는 엄마에게 살며시 다가가면 "남자는 부엌에 들어오는 게 아니야"라고 하시며 갓 구운 빵 한 덩이를 내게 건네 주시곤 했어.
난 따듯한 빵 한 조각을 손으로 떼어 입안에 넣고 오물거렸지. 고소함이 입 안에 가득 퍼지던 그 느낌을 잊을 수가 없네. 아버지는 임신한 양들을 둘러 보신 후 집으로 들어와서는 내 뺨을 두 손으로 쓰다듬어 주셨는데 차가운 아버지의 그 두 손에서 느껴지던 서늘함이 마냥 싫지만은 않았어. 사랑받는 느낌이었지.
긴 겨울이 지나고 올리브 나무에 물이 오르는 봄이 돌아왔지. 임신한 양들이 하나 둘 새끼를 낳았는데 그중에 한 마리가 새끼를 낳다가 죽고 말았어.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갓 태어난 새끼양은 내가 등을 쓰다듬을 때마다 큰 눈망울을 꿈뻑이며 나를 올려다보곤 했지. 사랑스러운 모습이더군. 아버지는 내 손을 꼭 잡아 주시며 특별히 잘 돌 봐주어야 하니 이름을 하나 지어 주라고 하셨어.
며칠을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난 그 새끼 양에게 '베다(하얗다)'라는 이름을 주었지. 눈처럼 하얀 새끼 양에게 무척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어. 아버지와 엄마도 좋은 이름이라고 하시며 그 이름을 이내 불러 주셨지. 내가 지어 준 이름을 다른 사람들의 입을 통해 듣는 일은 나에게 뿌듯함을 느끼게 했어.
그 해 가을이 되기까지 베다와 나는 무척이나 각별한 사이였어. 형제가 없었던 내게 베다는 친구 이상의 감정을 전해 주었지. 다른 어미 양들의 젖을 짜서 베다의 입 안에 넣어 주면 베다는 내 눈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혀로 그걸 받아먹곤 했어. 그걸 지켜보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지. 그때 베다의 깜찍했던 그 모습이 기억에서 잘 지워지질 않네.
가을이 지나면서 베다는 무럭무럭 자라기 시작했어. 바위 산의 여기저기를 뿔쩍 거리며 뛰어다니게 되었지. 아버지에게 점심을 전해 드리기 위해 가는 길에는 언제나 베다가 나와 함께 해 주었어. 가고 돌아오는 길에 난 수다스럽게 이런저런 얘기를 베다에게 들려주곤 했지. 그럴 때마다 베다는 알아듣는 건지 모르는지 '메에에~'거리며 내 눈을 빤히 쳐다보았어.
겨울이 지나고 또 봄이 돌아왔지. 베다는 이제 네 다리에 힘이 들어 가는지 쉴 새 없이 여기저기를 풀쩍풀쩍 뛰어다녔어. 어느새 베다에게 나는 형제와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는데 엄마는 어느 날 그런 내게 넌지시 "짐승에게 너무 정을 주면 나중에 힘들어진다..."하고 얘기를 하셨지만 아버지는 혼자인 내가 안쓰러웠는지 짐짓 모른 체 하셨던 것 같아.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어.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오시지 않아 기다리던 도중에 설핏 잠이 들었는데 새벽녘에 문득 잠이 깬 거야. 어두움 속에서 잠을 깨고 보니 나도 모르게 엄마를 찾게 되었어. 살금살금 방을 빠져나오는데 아버지가 어둠 속에서 흐느끼고 계셨어. 아버지가 우는 모습을 본 것은 처음이었지. 항상 온화하시고 말이 별로 없으셨던 아버지가 웬일일까? 다시 방으로 돌아와 잠이 들었는데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뜨고 보니 간 밤의 일이 모두 꿈인 듯싶었지.
그날 이후 며칠간 아버지는 내게 말을 걸지 않으셨어. 그러다가 어느 날 아침 내게 함께 갈 곳이 있으니 채비를 하라고 하셨지. 이웃 마을이라도 가시려는 걸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아버지의 표정은 무척 슬퍼 보였어. 엄마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셨는데 아버지는 엄마에게 "며칠 다녀오겠소..." 하는 말만 건네고는 내 손을 잡아 끄셨지.
궁금증이 마음속에 가득 찼지만 차마 물어보지는 못했어. 꿈속에서 보았던 아버지의 모습이 생각나서였을까? 이웃 마을은 아니었어. 걸어서 꼬박 3일은 걸리는 거리였지. 난생처음 가보는 길이라 괜한 설렘도 있었지만 아버지의 표정은 한결같은 슬픔으로 가득 차 보여 차마 내색도 할 수가 없었어.
아버지는 3일째 되는 날 외진 마을의 어귀에서 장작을 얼마간 사시더니 내 등에도 나누어 매게 하셨지. 좀처럼 험한 일을 시키시지 않으셨는데 그런 아버지가 조금은 낯설게 느껴졌어. 등에 장작을 메고 산을 오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지. 땀이 비처럼 쏟아졌어. 어깨가 욱신거리고 다리가 너무 아팠지만 표정 없이 앞만 바라보고 걸으시는 아버지에게 차마 내색을 할 수가 없었지.
가끔씩 뒤를 한 번씩 돌아보시던 아버지의 표정은 전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이었어. 세상 모든 것을 다 잃은 것 같은 표정이었다가 이내 강한 분노와 체념이 교차하는 사람의 표정이랄까? 당시의 어린 내가 정확히 설명 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표현일 거야. 아무튼 그랬어.
산 꼭대기에 이르러서야 아버지는 내게 장작을 내려놓으라고 하셨어. 그리고 내게 하나님에게 지금부터 번제를 드릴 거라 하셨지. 전에도 몇 번 아버지가 엄마에게 비슷한 이야기를 하셨던 적이 있었어. 그런데 번제를 위해서 필요한 양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지. 궁금증을 참지 못해 결국 아버지에게 물어보았어.
"아버지... 번제에 필요한 양은 어디에 있나요?"
내 질문에 한 동안 말없이 나를 빤히 쳐다보시던 아버지의 주름진 눈가에서 굵은 눈물이 와르르 쏟아져 내렸어. 그리고는 나를 와락 안아 주시면서 얘기하셨지.
"이삭아... 내 아들 이삭아... 내 생명보다 귀한 내 아들아. 세상의 티끌만큼도 죄 없이 순결한 내 아들아... 결코 하나님을 원망치 말고 나를 원망하거라. 하나님이 이 늙은 아브라함에게 너를 보내 주시더니 결국 다시 너를 데려가시려는구나. 하나님이 너의 영혼을 온전히 지켜 주실 거야."
흐느끼시는 아버지 옆에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졌어. 영문을 자세히 알 수는 없었지만 나를 안고 흐느끼시던 아버지의 모습에서 알 수 없는 숙연함 같은걸 느끼게 되는 순간이었지.
가지고 온 장작을 모두 쌓아 올리신 아버지가 이내 나를 옆으로 불러 기도를 하셨어. 아버지의 기도 소리를 듣는 동안 이상하게 내 마음은 담담함으로 가득 찼지. 아버지는 나를 장작 옆에 앉히신 후 허리춤에서 칼을 하나 꺼내셨어. 날카롭게 날이 선 칼이었어. 은빛으로 빛나는 칼날에 내 얼굴이 온전히 비추어졌었지. 나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고 있는데 어디선가 양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어. 무척이나 가까운 곳에서 나는 소리였지.
눈을 뜨고 보니 발치의 바위 밑에서 베다가 나를 바라보며 울고 있는 걸 발견하게 되었어. 지금에 와서도 영문을 잘 모르겠는데 지난 3일 동안 줄곧 내가 가는 길을 뒤에서 졸졸 따라온 것이라는 생각만 들더군. 베다를 보고 반가워하는 나의 환한 웃음을 지켜보시던 아버지가 이내 칼을 거두시고 베다를 내 대신 장작 옆에 눞히셨어.
"하나님이 네 대신 베다를 선택하시는구나."
하고 말씀하시며 내게 잠시 바위 밑에 가서 장작을 조금 더 가져다 달라고 하셨지. 이미 가지고 온 장작은 모두 쌓아 올렸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내 발길은 바위 밑을 향했어.
아버지와 함께 집으로 돌아온 나를 보시고 엄마는 맨 발로 뛰어나와 나를 꼭 안아 주셨어. 한참을 우셨지. 내색을 하지는 않았지만 한동안 베다 생각만 했었어. 나중에 세월이 흘러 내가 '리브가'라는 아가씨와 결혼을 해서 첫아들을 얻었을 때 난 그 아이에게 '에서'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지.
온몸이 하얀 털로 덮인 그 아이에게서 난 어쩌면 오래전 헤어진 베다를 연상했던 것일까? 둘째인 '야곱'보다 유난히 에서에게 더 마음이 갔던 이유가 말이야.
나중에 아버지와 함께 장작을 메고 올랐던 그 산의 이름이 '모리아 산'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아주 아주 나중의 사람들은 또 그 산을 '갈보리 산'이라고도 부르더군.
그리고 베다와 헤어진 바로 그 장소에서 한 남자가 '십자가'에 매달리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어. 베다가 나를 대신했던 같은 장소에서 그 남자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대신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지. 내가 장작을 메고 걸었던 그 길 위에서 십자가를 멘 그 남자도 무척이나 힘들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