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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8 KM

마지막 순간 과연 그를 기억해 냈을까?

by 오스만

외줄기로 길게 뻗은 아스팔트 도로 너머로 산맥과 산맥의 실루엣이 여럿 겹쳐 보였다. 자동차의 속도계가 120을 가리키면서 '띵띵 띵' 하는 과속 경고음이 들렸다가 꺼지기를 수차례 반복했다. 고원과 초원 그리고 사막이 공존하는 차창 밖 풍경 속에서 나는 아주 오래전 이 길 위를 힘겹게 걸었던 한 남자와 그의 여자를 어렴풋이 기억해 내었다.


모래폭풍이 불었다. 세상이 온통 노랗게 보였다. 남자가 뒤를 돌아보자 여자가 주저앉아 있다 웅크렸던 다리를 그제야 폈다. 그런 여자를 향해 남자가 오른손바닥을 펴 내어 보이며 옆으로 와 앉으라 했다. 방향 없는 바람에 남자와 여자가 몸에 두른 옷자락이 펄럭거리는 소리를 요란 스레이 냈다.


남자가 가지고 있던 말린 열매 몇 개를 여자에게 건네자 여자가 그중 하나를 받아 입으로 가져가 몇 차례 씹다가 연신 기침을 해대며 그것을 땅위에 도로 뱉어냈다. 여자의 기침 소리를 들으며 남자가 여자의 안색을 유심히 살폈다. 여자의 주름진 눈가에 맺힌 눈물을 남자가 한 손으로 닦아 주었다. 모든 것이 변했지만 왜 변했는지 알 수 없었고 그 변화의 이유를 어느 누구에게도 물어볼 수 없었다.


남자가 처음 여자를 만난 것은 어느 봄날 아침이었다. 아침 햇살에 눈을 반쯤 감고 누워 있을 때 그녀가 수줍게 다가오는 모습을 그는 꿈처럼 느끼며 보고 있었다. 아침햇살의 빛을 받아 이슬이 반짝거리는 그녀의 풍성한 밤색 머릿결에서 벌꿀 냄새가 아련히 풍겨져 왔다. 여자는 한동안 남자를 내려다 보고 조용히 웃고 있었다. 남자는 여자의 웃음에 왼쪽 심장의 박동이 빨라지고 있는 걸 느꼈다. 일찍이 느껴보지 못했던 낯선 기쁨과 사랑의 격한 감정이 그 마음속에서 출렁이고 있는 걸 느꼈다.


모든 일들이 새로운 것이 되었다. 시냇가에 앉아 물아래 알록달록한 고기들이 이리저리 헤엄치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그녀에게 호기심 가득한 미소를 주는 일이었고 그런 그녀의 옆에 있던 그는 이제 물고기 대신 그녀의 얼굴을 옆에서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부드러운 풀숲 위에 재스민 꽃잎이 비처럼 내려 땅을 하얗게 덮으면 그녀는 두 손 가득 꽃잎을 담아 살금살금 그에게 다가선 후 머리 위로 꽃들을 확 뿌리고는 깔깔대며 달아났다. 그 시절 남자와 여자는 호기심 가득한 소년과 소녀였고 세상은 하루하루 새로움과 신비함으로 온통 가득한 곳이었다.


봄의 정원에는 꽃들이 만발했다. 나무는 돌아가며 열매를 맺었고 굶주림과 병치레 한 번 없이 남자와 여자는 해가 진 시간 밤하늘의 별들을 지켜보다 잠이 들곤 했다. 그리고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에 잠에서 깨면 아침 해가 뉘엿뉘엿 떠오를 뿐이었다. 부족함도 넘침도 없었고 분노와 슬픔. 두려움도 없었다. 어떤 것을 얻기 위한 초조함이나 고단함 없이 남자와 여자는 단지 해가 뜨고 해가 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봄의 정원에서 지냈다. 모든 것이 영원할 것 같은 시간이었다.


황금빛이 감돌던 여자의 밤색 머리칼이 지금은 하얗게 새어 버렸다. 모래바람을 피해 바람의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던 그 여자를 남자가 두 팔로 감싸 안았다. 앙상하게 변한 여자의 몸은 옷자락으로 스며든 바람처럼 실체가 없이 느껴졌다. 여자가 말을 잃고 남자를 알아보지 못한 것은 이미 수년 전부터였다. 남자는 더 이상 물 백합 같았던 그녀의 미소를 볼 수 없었다.


남자가 남쪽으로 방향을 잡아 여자와 동행을 한 것은 여자에게 다시 한번 옛 기억의 일부나마 되찾아 주고자 하는 생각이었다. 오래전 그들이 잃어버렸던 봄의 정원에 대한 아득한 기억을 막연히 좇아가고 있었지만 그의 고단한 여정은 좀처럼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저 산을 넘어가면 저 사막을 건너면 저 강을 거슬러 내려가면 하는 그의 생각은 점점 지쳐갔고 무표정하게 그의 뒤를 따르던 여자는 갈수록 더 낯설게 느껴졌다.


남자가 여자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들이 막 지나 간 사막과 초원의 경계에도 이제 저녁 어둠이 내려앉았다.


398 KM.

마디나에서 젯다까지의 거리는 자동차로 꼬박 네 시간이 걸리는 거리였다. 남자는 젯다 어딘가에 여자의 몸을 묻었고 나중에 사람들은 하와,

아담의 여자인 그녀를 추모하며 그곳을
'젯다(할머니)'라 부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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