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azza di Spagna, il gelato
이탈리아 로마 '레오나르도 다 빈치' 공항에 도착한 직후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자 시간은 이미 토요일 오후 세시를 지나고 있었다.
비행기 트랙을 내려가 입국장까지 다소 긴 공항버스의 이동이 이어졌지만 복잡한 별도 입국 수속은 필요하지 않았다. 문 하나를 겨우 넘어 서자 몇몇 사람들이 손에 작은 팻말을 하나씩 들고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모습이 보였다. 입국장 인근에서 현금 지급기를 이리저리 찾아 얼마간의 유로화를 인출하려 하였는데 여의치가 않아 바로 공항 바깥에 서 있는 택시를 한 대 잡았다.
택시 기사는 60세 전후 나이로 보이는 초로의 여자였는데 카드결제가 되지 않으니 시내로 나가는 길에 보이는 아무 은행 현금지급기에서 돈을 찾으라고 권했다. 택시가 공항을 서서히 빠져나가자 주변의 풍광이 차츰 눈에 들어왔다. 분명 로마가 처음 방문이었지만 딱히 낯 설지 않은 이 기시감은 왠 것일까? 무어라 마땅히 딱 떠오르는 생각은 없지만 어색하지 않은 편안함과 설렘이 서로 섞이는 느낌이었다.
시내로 들어가는 길에 들른 은행 현금지급기에서 약간의 현금을 인출했다. 구불구불하게 연결된 도로를 택시는 덜컹대며 계속 달렸고 여기저기 보이는 구조물들을 연신 손으로 가리키던 택시기사가 영어로 안내를 해 주었는데 나름 알아듣기 쉬운 설명이었다. 택시가 막 도착한 곳은 사람들의 왕래가 무척 복잡한 곳이었는데 택시 기사는 오른편 방향을 손으로 가리키며 여기가 바로 '트레비 분수'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택시비를 치르고 인사를 했다. "그라찌에.. 시뇨라."
트레비 분수에서 다소 멍하니 오고 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다 '스페인 광장' 방향을 인근 가게 점원에게 물어 그쪽으로 방향을 정했다. 일본인 단체 관광객으로 보이는 노인들이 나란히 줄을 지어 관광 안내원을 따라 길을 걷는 게 눈에 띄었다. 일전 벨기에 브뤼셀에서 중국인 관광객 일행을 우연히 따라가다가 '오줌싸개 소년 동상'을 찾았던 일이 문득 생각 나 발걸음을 한동안 그들과 함께 했다. 스페인 광장은 트레비 분수에서 빠른 걸음으로 15분 남짓한 거리였는데 트레비 분수 인근에 모여 있던 수의 두 배 정도 되는 사람들이 손에 카메라나 휴대폰을 들고 사진 찍기에 온통 여념이 없었다.
스페인 광장의 계단을 천천히 걸어 올라 아래를 지긋이 내려다보았다. 아이스크림 하나를 손에 들고 일상에서의 일탈을 꿈꾸던 철부지 앤 공주와 그의 주변을 서성이고 있던 신문사 기자 조 브래들리는 어디쯤 앉아 있었을까? 그 장면을 보기 위해 '로마의 휴일'이라는 그 영화를 몇 번이나 보고 또 보았던가? 이런저런 생각으로 잠시 동안 계단에 주저앉아 영화 속 몇 장면을 계속 떠 올리며 시간을 보냈다. 어둠이 내려앉으면서 하나둘씩 광장 인근에 조명이 밝아왔다.
스페인 광장의 계단을 내려와 들어 선 골목길은 말 그대로 오고 가는 사람들로 인해 한치 발걸음을 옮기기가 힘들었는데 옹기종기 모여있는 명품 상점 앞에는 한국인과 중국인들로 보이는 동양인 그룹들이 손에 번호표를 하나씩 받아 들고는 자기 차례의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시바삐 혼잡한 이 거리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발걸음을 재촉하다 인근의 성당에 잠시 들러 장의자에 앉아 높은 천정의 벽화들을 살폈다.
성당에서 나오자 어디서 폭죽 터지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건물들에 가려져 보이지는 않았지만 거리의 끝에서 나는 소리가 분명했다. 걸음을 폭죽이 터지는 소리 방향으로 옮기자 점점 더 폭죽의 폭발음이 선명해졌다. 혼잡한 거리의 끝을 벗어나자 넓은 광장이었다. 광장에는 거리에서 보다 더 많은 사람들로 가득했는데 그들의 시선은 한결같이 폭죽이 터지는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쉴 새 없이 폭죽이 터지고 사람들의 감탄소리가 이어졌다. 광장 끝에는 중국어로 새해를 축하한다는 플래카드가 여럿 보였는데 아마도 이 불꽃놀이의 주최 또한 중국 쪽인 듯했다. 여기저기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는 경찰과 군인들의 차량들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이십여분 간 계속된 불꽃놀이가 모두 끝나자 광장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박수를 쳤다. 매캐한 화약냄새를 뒤로하고 지나온 거리를 거슬러 오르자 다시 스페인 광장이 나왔다. 조명이 빛나는 밤의 광장 주변에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광장 앞 젤라토 가게에 들러 레몬 셔벗 하나를 주문했다. 스페인 광장 돌계단에 앉아 손에 든 그것을 한 입 베어 물었다.
레몬 맛 아이스크림은 상큼했지만 전혀 새로운 맛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어디선가 '뎅그랑' 거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로마 시내에 들어올 때 느꼈던 기시감이 어렴풋하게나마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레몬 맛 아이스크림이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 듯 로마는 그저 내게 그동안 너무 익숙해져 있었던 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