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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아시스 Mar 05. 2020

ㅇㅈ ㅇ ㅇㅈ

다름을 인정하는 사회 그리고 복지사

  ‘ㅇㅈ ㅇ ㅇㅈ’은 이제는 추억이 돼버린 예전 스마트복지관의 관훈(館訓)이었다. 한 때 스마트복지관은 일주일이 멀다하고 육지에서 견학을 온 사람들로 북적였었다. (아! 옛날이여...) 사람들은 스마트복지관 사무실 한 가운데에 떡하니 걸려 있는 이 난해한 자음들의 뜻이 무엇인지 많이들 궁금해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장난삼아 그들에게 한번 맞춰보라고 해봤다. 나의 짓궂은 질문에 사람들은 ‘오징...어 어장?’, ‘아자! 아~ 아자!’ 등 센스 있는 대답으로 한바탕 웃음바다가 되곤 했었다. ‘ㅇㅈ ㅇ ㅇㅈ’은 요즘 네티즌들이 많이 쓰고 있는 일명 ‘급식체(학교에서 급식을 먹는 청소년들이 주로 사용하는 말투)’ 중에 하나다. 풀어서 제대로 써보면 ‘인정? 어, 인정’. 별 뜻 없이 그냥 인정한다는 말이다. 처음에 사람들은 사회복지사들의 사명과도 같은 관훈을 너무 장난스럽게 써놓았다며 다들 비웃었지만 그 의미를 알고 난 다음부터는 이내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숙연해졌다.

옛)스마트복지관 관훈(사진: 윤미주)

  급식체 관훈의 탄생비화는 이렇다. 어느 날 스마트복지관 사회복지사들이 테이블에 둘러앉아 (사례)회의를 하고 있었다. 회의 주제는 생활고에 시달리는 한 가정의 문제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분위기는 사뭇 심각했다. 복지관에서는 이미 수년간 그 가정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번의 상담과 생활지원을 해왔지만 문제해결의 기미는 보이지 않고 답답한 상황만 이어져 오고 있었다. 더 큰 문제는 착하고 성실했던 담당 사회복지사는 그날따라 유난히 지쳐 보였다. 이제 더 이상 그 가정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자포자기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해결책은 나오지 않고 한숨만 터져 나오는 회의가 계속되자 누군가 무심코 “그 사람은 도대체 왜 그런지 이해할 수 없어!”라고 푸념까지 터져 나왔다. 나 또한 그동안의 노력과 기다림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딱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래도 관리자로서 직원들의 사기진작을 위해서라도 뭐라고 한 마디는 해야 했다. “그래도 (그 사람은) 죽지 않고 살아있지 않느냐. 사회복지사가 대상자를 이해할려고만 하면 해결책을 찾기란 점점 더 어려워진다. 먼저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천천히 마음을 열어보자.” 직장 상사의 말이 통했는지 안했는지 그렇게 반강제로 회의는 어색하게 마무리가 됐다. 그런데 그 말이 무언가 해답을 얻진 못했지만 직원들에게는 다시 한 번 해보자는 동기부여는 되었었던가 보다. 그 날부터 우리는 이해가 안 될 때는 그냥 쿨~하게 인정해주기로 서로 다짐했다. 그렇게 스마트복지관 직원들은 우연한 계기로 얻은 깨달음을 마음깊이 새기고자 ‘인정’을 (갑자기?)관훈으로 정했고, 젊은 직원들의 재치로 요즘 유행하는 급식체로 적어 벽에 걸게 되었다.


이해와 인정

  곰곰이 생각해보면 지난 20년 동안 사회복지를 공부하고 또 사회복지사로 살아오면서 ‘인정’이라는 단어가 참 낯설게 느껴진다. 나는 지역사회(또는 클라이언트)를 항상 이해하려고만 애썼지 인정의 대상으로 바라보진 못했던 것 같다. 지금껏 나는 세상을 바라볼 때 부족한 문제만을 찾아 그것을 수학문제 마냥 공식대로 풀려고만 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 그럴만도 했던 것이 요즘 사회복지가 너무 성과 중심, 실적 중심이 되다보니 사회복지사들 눈에는 세상이 전부 문제투성이로만 보이고, 업무는 문제해결사와 같은 역할로 전락해 버린 것도 원인 중에 하나인 것 같다. 배가 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집이 필요한 사람에게 집을 주고, 돈이 필요한 사람에게 돈을 주는 것이 가장 빠르게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고 실적 쌓기가 편하니 말이다. 그러다보니 쉽게 해결될 것 같지 않은 문제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비교적 쉬운 문제만 찾게 됐다. 그렇게 사회복지 예산은 매년 증가하고 있고, 그에 따른 실적과 성과도 많아졌지만 커진 숫자만큼 세상이(사회복지가) 좋아졌다는 말은 들리지 않는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도 모른 채 사회정의는 점점 주관적 가치에 몰입되고, 사회복지의 가치 또한 주관적인 성과와 실적에 의존하고 있으니 백수인 사회복지사가 보기에도 씁쓸하기만 하다.


  나는 대학에서 지역사회복지를 가르치고 있지만, 매번 수업 때마다 학생들을 어떻게 이해시켜야 할지 막막할 때가 많다. 왜냐하면 지역사회복지는 정답이 없을 뿐더러 정작 학생들은 강의실에서 이해한 내용들을 실제 현장에서 써먹기가 정말 어려운 것이 사회복지이기 때문이다. (교수가 돼서 할 말은 아니지만) 시시각각 변하는 것이 지역사회이고, 사람들은 지역사회 안에서 서로 유기적으로 공존하면서 살고 있는데, 사람과 지역사회를 대상으로 하는 사회복지를 제대로 이해하기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를 일이다.


다름을 인정한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복지사는 지역사회 안에서 끊임없이 문제를 발굴하고 해결해야 하는 직업적 사명이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복잡하고 다양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지역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세상을 이해하기보다 먼저 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인정’이다. ‘인정’이란 말은 왠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포기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사회복지사에게 ‘인정’이란 자신이 가진 주관적인 관점을 배제하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배우고 경험한 것을 기반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상대방을 주관적으로 이해하고 판단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자신과 같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모든 사람들이 생김새가 다르듯이 각자의 가치관도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주자는 말이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면 그제야 상대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사회복지사에게 인정은 곧 존중이고, 존중이 곧 맞춤형 복지가 된다는 것을 새삼스레 깨닫게 된다.


너도 옳고, 너도 옳고, 그리고 너도 옳다

  <너도 옳고, 너도 옳고, 그리고 너도 옳다>라는 이야기는 그 옛날 조선시대 황희정승의 유명한 일화 중에 하나다.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다툼은 서로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각자의 입장이 다르기 때문에 쉽게 판단하지 않는다는 황희정승의 신중함을 보여주는 이야기다. 사실 세상에는 누구도 틀린 사람이 없다. 대신 각자가 정해놓은 주관적인 기준만 있을 뿐이다. 사회복지사가 일상에서 마주치는 일들도 문제로만 봐서 문제가 되는 것이지 사실은 상대적인 다름이 아닐까. 사회복지사가 이해할 수 없다는 핑계로 문제를 회피하는 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그것은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 ‘ㅇㅈ ㅇ ㅇㅈ’의 또 다른 사회복지적 해석이다.


...인정하면 지는 것인가... 알쓸복잡

*그림출처: Joseph & John Story(https://jesuslovesu.tistory.com/m/105)


  어느 날 황희정승의 집안 노비 둘이 서로 다투는 일이 있었다. 그 중 한 노비가 다른 노비가 잘못한 점을 고하자 황희 정승은 “네 말이 옳다”고 말했다. 이어서 또 다른 노비가 와서 앞서 다녀간 노비의 잘못을 고하자 “네 말도 옳다”고 말했다. 그러자 옆에서 이를 듣고 있던 황희정승의 부인이 "이쪽도 옳고 저쪽도 옳다고 하면 대체 어느 쪽이 틀렸다는 말씀입니까?” 하자 “부인 말도 옳소”라고 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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