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복지실천의 자유와 정의에 관하여
전 세계가(아니 지구가) 코로나-19로 인해 한바탕 홍역을 치루고 있다. 그나마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방역 모범국가로 인정받고 있을 만큼 정부와 의료진들이 잘 대처해준 덕분에 조금씩 수그러들고 있는 분위기다. 또 지난 몇 개월 동안 코로나-19의 지역사회 감염을 막기 위해 강도 높은 ‘사회적 거리두기’를 시행하면서 온 국민이 함께 부단히 노력한 결과라고도 볼 수 있다. 요즘 인터넷에서는 그간 고생한 공무원들과 의료진들에게 감사인사를 전하는 캠페인을 하고 있던데, 나도 이참에 동참하는 의미에서 인사를 드려야겠다. #덕분에 감사했습니다.
이번 코로나-19처럼 예상치 못한 재난상황이 발생했을 때 가장 빛을 발하는 것이 바로 매뉴얼이 아닐까 싶다. 매뉴얼은 사전에 미리 재난상황을 가정하여 분야별 담당과 책임을 규정함으로써 급한 마음에서 오는 실수를 최소화할 수 있다. 또 아비규환의 혼란한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을 한꺼번에 안전하게 대피시킬 때도 매뉴얼은 필수다. 평소 TV를 켤 때 매뉴얼을 보는 사람은 없겠지만 집에 불이 났을 때 완강기를 사용하려면 매뉴얼을 읽어야 한다. 집에 자주 불이 나는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완강기 사용법은 대부분 잘 모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주 일어나지 않는 사고에 대해서는 언제든지 즉각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완벽한 매뉴얼만 있어야 우리의 소중한 생명을 지킬 수 있다. 지금이라도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일이 없도록 평소에 무심코 지나쳤던 매뉴얼들을 찾아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다.
매뉴얼의 나라, 일본
매뉴얼하면 이웃나라 일본을 빼놓을 수 없다. 일본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매뉴얼이다. 지진이 일어나면 10초 만에 방송에 재난경보가 뜨고 1분도 안 되서 뉴스속보로 넘어간다. 하물며 일본국민들도 침착하게 평소 훈련된 매뉴얼에 따라 일사불란(一絲不亂)한 모습을 보면 경외심마저 느껴진다. 그 옛날 일본에는 비 오는 날 좁은 골목길에서 우산을 든 두 사람이 마주쳤을 때 어느 쪽이 먼저 비켜줘야 하는 지까지 정해져 있었다고 하니 매뉴얼이 얼마나 생활화되어 있을지 짐작이 간다.
지난 1월, 수천 명의 탑승객을 태운 일본 크루즈선에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하는 일이 있었다. 전 세계적으로 대유행을 하고 있는 코로나-19에 일본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도쿄 올림픽을 코앞에 둔 상황에서 일본방역당국의 대응은 전 세계로부터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일본정부의 대응은 ‘매뉴얼 1등 국가’다운 모습은 아니었다. 일본의 방역당국은 본토 내 코로나-19 바이러스 확산을 우려해 크루즈선을 요코하마항에 정박시키고 탑승객 전원의 하선을 금지하고 한 달 가까이 바다 위에 그대로 격리시켰다. 전문가들은 크루즈선과 같이 밀폐된 환경에서는 환기구를 통해 바이러스가 쉽게 확산될 수 있어 감염 위험이 더 높다며 모든 탑승객들을 즉시 하선시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일본 정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속절없이 시간만 흘려보내고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700명이 넘는 확진자가 발생하고 일본과 영국 국적의 탑승객 6명이 사망했다. 철저한 매뉴얼을 가지고 지진과 같은 재난에는 의연하게 대처했던 일본이 한 번도 대면한적 없는 낯선 바이러스 앞에서 허둥지둥 예상 밖의 모습을 보인 것이다. ‘매뉴얼의 나라’ 일본에 과연 어떤 속사정이 있을지 사뭇 궁금해진다.
일본에는 한국인이 들으면 입이 딱 벌어질 만큼 다양한 매뉴얼이 존재하는데,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일본의 메이와쿠(めいわく, 迷惑)문화 때문이라고 한다. 메이와쿠는 일본어로 ‘민폐’라는 뜻으로, 어릴 때부터 ‘타인에게 민폐를 끼치면 안 된다’는 교육을 받고 자란 일본인들에게 자연스럽게 깔려 있는 의식이다. 매뉴얼을 심하다싶을 정도로 꼼꼼하게 만들어 놓은 것도 다 ‘서로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즉, ‘피차 책임질 일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일본에서 가장 무서운 말이 “선례(매뉴얼)가 없다”는 말이라고 한다. 아무리 합리적이고 기대이익이 커도, (설령 재난상황이라도?) 선례(매뉴얼)가 없으면 꿈쩍도 하지 않는 나라가 바로 일본이다. 선례를 만드는 순간, 그에 따르는 결과를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란다. 한국에서는 시키는 일만 하면 욕을 먹는다지만, 일본은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면 욕을 먹는 나라다.
날이 갈수록 점점 복잡해져만 가는 세상인데 서로 간에 책임질 일은 될 수 있으면 하지 않는 게 좋다. 그러려면 아무래도 매뉴얼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그대로 지키면서 사는 게 상책이다. 그런데 일본의 크루즈선 사고에서 알 수 있듯이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을 때 너무 매뉴얼에만 의존하다보면 오히려 큰 낭패를 겪을 수도 있다. 사실 매뉴얼은 앞으로 일어날(지도 모를) 일을 미리 예상해서 만든 것이기 때문에 이론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세상일이라는 게 매뉴얼대로 되리라는 법이 어디 있겠는가 말이다. 현실은 언제나 상상을 초월하는 법이다. 세월호와 같은 사고에서 선장과 승무원들이 배를 버리고 가장 먼저 탈출할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매뉴얼이 없는 것도 문제지만, 있어도 지키지 않으면 무용지물이 되는 것도 바로 매뉴얼이다.
매뉴얼대로만 살아간다면
내가 일하는 사회복지도 두 말할 나위가 없다. 사회복지는 매뉴얼로 시작해서 매뉴얼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공의 서비스인 사회복지를 민간에게 위탁하는 형식이다 보니 공무원들이 만든 매뉴얼을 민간의 사회복지사가 그대로 따라 하면 되는 구조다. 매뉴얼대로만 하면 책임질 일은 없겠지만, 만약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책임은 매뉴얼을 따르지 않은 자의 몫이다. 그래서 일까? 언제부턴가 사회복지사들도 매뉴얼대로만 일하고, 매뉴얼에 없는 일은 굳이 시도하려 하지 않는다. 무언가 다른 목적(?)이 있으면 모를까 시키지도 않는 일을 해서 별로 득이 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사회복지사를 공무원으로 착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사회복지가 매뉴얼이 잘 갖춰져 있다는 것은 사람들이 보기에 업무 체계가 잘 잡혀있다고 볼 수는 있겠다. 하지만 일선에서 일하는 사회복지사의 입장에서는 썩 좋아할 일만은 아닌 것 같다. 사회복지 현장에 존재하는 수많은 매뉴얼이 업무를 효율적으로 해나가기 위한 목적만 있는 것일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사회복지를 관리하고 감독하는 사람(매뉴얼을 만든 사람)들이 문제가 발생했을 때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목적도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어느 사회복지 기관에서 무슨 사고라도 일어나면 (예방차원에서) 그나마 있던 매뉴얼도 더 강화된다. 그리고 강화된 매뉴얼만큼 사회복지사의 생각은 경직되고, 행동은 더 소극적으로 변하고 만다.
사회복지사의 자유와 정의
사회복지사는 인본주의·평등주의 사상에 기초하여, 모든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존중하고 천부의 자유권과 생존권의 보장활동에 헌신한다. 특히 사회적·경제적 약자들의 편에 서서 사회정의와 평등·자유와 민주주의 가치를 실현하는데 앞장선다. - 사회복지사 윤리강령 전문
나는 「사회복지사 윤리강령」을 읽으면 참 많은 생각이 든다. 인본주의, 평등과 자유, 사회정의와 민주주의, 그리고 사회복지사의 헌신....... 사회복지사와 잘 어울릴 것 같은 미사여구(美辭麗句)가 나열돼 있어 보기에 좋을지는 모르겠지만 딱히 가슴에 와 닿지는 않는다. 윤리강령도 일종의 매뉴얼이다. 매뉴얼에 갇힌 사회복지사의 삶이 과연 자유와 정의를 말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사실 거기에 적힌 자유니 평등이니 하는 것들은 사회복지사의 것이 아니다. 사회복지사는 그저 매뉴얼(윤리강령)에 따라 그것들을 위해 헌신하라는 말인 것 같다. 새삼스럽지만 이 세상에 사회복지사를 위한 자유와 정의는 어디에도 없는 것 같아 씁쓸하다.
사회복지사의 자유와 정의....... 머릿속에 많은 생각이 맴돌지만 나의 미천한 철학적 사고로는 뭐라 말할 처지가 안 되는 것 같다. 그런데 우연히 책을 읽다가 내가 좋아하는 독일의 철학자 칸트(Immanuel Kant, 1724~1804)가 그 질문의 답을 ‘툭’ 던져 주었다. (반갑게도) 칸트도 ‘사람은 누구나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고 했다. 그 이유는 (모두가 알다시피)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은 자율적 존재이며, 자유롭게 행동하고 선택할 능력이 있다고 했다. 그가 말하는 자유롭게 행동한다는 것은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자율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사회적 관습에 따라서가 아니라 내가 나에게 부여한 법칙(이성)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왜냐면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기 때문에....... 여기까지는 다들 한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칸트의 철학이다. 칸트=이성(理性).
칸트의 철학을 보다보니 매뉴얼은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것과 반대되는 개념이었다. 매뉴얼은 타율적이다. 내가 타율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나의 밖에서 주어진 목적에 따라 행동한다는 뜻이다. 사회복지사가 대학에서 사회복지를 아무리 공부했다한들 현장에서 매뉴얼대로만 일한다면 그것은 사회복지가 추구하는 목적의 주체가 아니라 도구가 될 뿐이다. 칸트는 공리주의를 거부한다. 왜냐하면 공리주의는 인간을 전체의 행복을 위한 도구로 보기 때문이다. 칸트가 말하는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한다는 것은 인간 자체를 목적으로 취급한다는 뜻이다.
「사회복지사 윤리강령」을 만든 사람들이 보편적 인권을 믿는 사람이라면 공리주의자는 아닐 것이다(아니길 바란다). 모든 인간은 그가 누구든, 어디에 살든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면, 단순히 집단적 행복의 도구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사회복지사도 예외일 수는 없다. 소수에 의해 만들어진 사회복지의 매뉴얼이 다수의 행복에 기여한다고 해서, 또 그것으로 인해 사회복지사의 (천부적)인권을 희생(헌신)하면서 얻는 것이라면 그것은 정의가 아니라고 칸트는 말한다.
매뉴얼이 있어도 문제, 없어도 문제라면 우리는 이러한 매뉴얼이 갖는 이중성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그것은 다름 아닌 (칸트가 말하는) 자유다. 칸트의 자유는 그냥 자유가 아닌 정언명령*에 따른 자유다. 사회복지는 공공(公共)의 서비스를 다수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제공하는 만큼 기본적인 매뉴얼을 갖추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매뉴얼을 갖추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현장의 상황 판단에 따른 신속하고 융통성 있는 자율적인 결정이다. 매뉴얼을 만드는 것이 평상시 담당 공무원의 몫이라면, 위기가 발생했을 때 현장의 빠른 결정을 가능케 하는 것은 현장 책임자의 몫이다. 현장의 전문가들이 독자적으로 판단하고 빨리 행동할 수 있도록 권한을 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Freedom is not free! But.......
사회복지가 자율적(―칸트가 말하는 정언명령에 따른―)으로 행해지지 않고, 짜여진 매뉴얼에 따라 타율적으로 행해진다면 그것은 자유도 아니고 정의도 아니다. “Freedom is not free” 자유에는 반드시 책임이 주어진다. 이것은 아주 상식적이다. 그런데 책임은 떠넘기면서 자유(권한)를 뺏는 것은 양아치(?)나 할 짓이다. 사회복지사의 이성(도덕)과 전문성을 의심하지 않는다면 그에 걸맞은 자유와 권한을 주자. 사회복지사는 행복을 위한 도구가 아니다. ♣
*정언명령: 칸트가 말하는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른 행동이 모든 사람이 인정할 만한 보편적 원리에 따른 행동인지 판단하는 준칙
※참고문헌
1. 김상욱, 『김상욱의 과학공부』, 동아시아, 2016
2. 마이클센델, 『정의란 무엇인가』, 김영사, 2010
3. 매뉴얼의 함정, (https://www.mk.co.kr/news/business/view/2015/03/195940/)
4. 일본이 왜 저럴까: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매뉴얼, (https://hub.zum.com/ppss/487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