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사회의 개념과 공동체에 관하여
내 고향은 경상북도 안동이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줄곧 안동에서 살았다. 그런데 내가 태어난 고향집은 안동 시내에서 버스를 타고도 1시간이나 더 들어가야 하는 시골 마을이었다. 30년 전 수력발전소가 건설되면서 지금은 비록 사라져버렸지만 어릴 적 살던 동네의 모습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우리 동네는 윗마을과 아랫마을이 있었는데 나는 아랫마을에서 살았다. 여느 시골마을처럼 입구에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우뚝 서서 마을을 지키고, 개천을 가로지르는 커다란 다리―어릴 적에는 엄청 큰 다리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난간이 무릎까지밖에 안 온다―를 건너면 50가구 정도가 사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고즈넉한 마을이 나온다. 해질녘이면 집집마다 굴뚝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고, 골목 구석구석 감나무며 오얏나무, 앵두나무들이 많아 사시사철 먹을 것들이 즐비했다. 다 큰 어른이 돼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마치 작은 둥지와도 같았던 그 동네가 나의 어릴 적 세상의 전부였다.
나는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윗마을에 가본 적이 없다. 작은 언덕배기 하나만 넘으면 금방이라도 갈 수 있는 이웃마을이었지만 어린 나이에 딱히 갈 일이 없었다. 그래서 어린 나에게 윗마을은 언제나 미지의 신비로 남아있었다. 학교에 갈 나이가 돼서야 나는 비로소 나의 작은 세상을 벗어날 수 있었다. 학교는 윗마을을 지나 1시간 가까이 걸어가야 했는데 나는 그때서야 처음으로 윗마을에 가봤다. 윗마을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사람들의 생김새도, 집들의 모양도, 풀과 나무들도 모든 것이 낯설고 신기했다. 그런데 막상 학교에 가보니까 미지의 세상은 훨씬 더 많았다. 고작 1시간도 안 되는 거리에 있는 우리 마을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친구들 중에는 학교에서 (걸어서)2시간이나 넘게 떨어진 곳에서 오는 친구도 있었는데 늘 그렇듯 그 친구는 항상 나보다 일찍 등교했다. 전교생이 50명도 채 안된 나의 초등학교는 내가 졸업한 후로 얼마 지나지 않아 폐교가 됐다. 중학교는 좀 더 먼 읍내에 있어 버스를 타고 다녔다. 고등학교는 그보다도 먼 시내에 있어서 통학도 어려워 자취를 해야만 했다. 그리고 나는 대학에 가서야 드디어 안동을 떠났다. 나는 그렇게 더 크고 새로운 지역사회를 만나면서 점점 어른이 되어 갔다.
나는 그냥 촌놈?!
그렇다. 지금까지 이야기만 보면 나는 누가 봐도 그냥 촌놈이다. 지금은 결혼을 하고 도시에 살고 있지만(―아파트에 살면 나름 도시에 사는 게 아닌가―) 어릴 적 시골 동네 아랫마을에 살았던 나는 어김없이 촌놈이 되고 만다. 중학교에 다닐 때는 읍내에 살던 친구들이 나보고 촌놈이라고 했다. 그래, 읍내에는 짜장면집도 있었고 오락실도 있었으니 그렇다고 치자. 고등학교에 가니 시내에 사는 친구들이 또 그랬다. 그나마 시내에는 아파트도 많고, 극장도 있고, 시외버스터미널도 있으니 그럭저럭 인정. 그런데 대학에 가서도 서울에 사는 놈(?)들이 나보고 또 촌놈이랬다. 그 놈들은 서울사람 빼곤 다 촌놈이라고 할 놈들이다. 어찌됐건 나는 늙어 죽을 때까지 영문도 모른 체 촌놈의 누명을 쓰고 살아야 할 팔자인가 보다.
그런데 나는 어쩌다 촌놈이 됐을까? 어릴 적 살던 동네가 시골마을이여서?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나름 시내(down town)에 있는 학교를 다녔는데? 시골은 아랫마을까지일까? 읍내까지일까? 아니면 안동 전체일까? 무슨 기준으로 도시와 시골을 구분할 수 있지? 아랫마을은 시골이고, 짜장면집이 있고 아파트가 있으면 도시일까? 그렇다면 내가 살던 지역사회는 어디일까? 초등학교 때까지는 아랫마을이고, 중학교 때부터는 읍내, 고등학교 때부터는 안동 전체가 나의 지역사회일까? 그럼 지금은 제주도에 살고 있으니까 현재 지역사회는 제주도일까? 그것도 아니면 그냥 퉁 쳐서 대한민국일까? (그것도 아니면 지구촌?) .......
나는 직업이 사회복지사이고 오랜 시간 지역사회복지 일을 해왔지만 민망하게도 일터인 지역사회에 대해 잘 모르고 사는 것 같다. 솔직히 사회복지사에게 지역사회는 너무나도 친숙한 나머지 별 생각 없이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심지어 나는 대학에서 지역사회복지를 가르치고 있기까지 한데 교수가 돼서 학생들을 볼 면목이 없다. 그래서 문뜩 이제라도 (많이 늦은 감이 있지만) 지역사회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참에 사회복지사로서 명예도 되찾고, 또 학생들에게 교수로서 체면도 세워야겠다. 그러다보면 내가 어쩌다 촌놈이 되었는지도 저절로 밝혀지지 않을까 싶다.
대한민국 5천만 개의 지역사회
사실 ‘지역사회’는 일반사람들이 잘 쓰지 않는 말이다. 직업이 공무원이거나 사회복지사가 아닌 다음에야 평소에 이 단어를 쓸 일이 별로 없다. 그런데 최근 발생한 코로나-19로 인해 ‘지역사회’라는 말이 사람들 사이에서 많이 회자되고 있다. 정부에서 코로나-19의 지역사회 감염을 막겠다며 전 국민을 상대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시행하면서부터다. 그래서 한 동안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 ‘지역사회’라는 검색어가 실시간으로 오르내리기도 했다. 내가 그랬듯 사람들도 지역사회가 무엇인지, 어디까지인지, 또 사회적 거리는 얼마나 둬야 하는지 다들 궁금하긴 마찬가지였나 보다. 부끄럽게도 사회복지사인 나도 ‘지역사회’를 검색해 봤지만 더 헷갈리기만 할 뿐 딱히 뾰족한 답을 얻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사람들마다 ‘지역사회’에 대한 생각이 달라서 인지는 몰라도 사회적 거리두기는 모두 제각각이었다. 아예 집밖에 나가지 않는 사람, 가족과 친구, 지인들까지는 괜찮다고 믿는 사람, 내가 사는 지역사회를 떠나 다른 지역사회로(제주도로) 떠나는 사람, 다른 지역사회(외국)에 살다가 해열제를 먹어가며 원래(?) 지역사회(한국)로 탈출하듯 돌아온 사람....... 각자 기준은 서로 달랐지만 자신이 사는 지역사회를 지키고자 했던 마음은 모두 똑같았을 것이라고 애써 믿고 싶다. 하지만 그 덕분에 지난 수개월동안 방역당국의 부단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코로나는 아직까지 완전히 근절되지 않고 있다. 나는 방역전문가는 아니지만 그 원인을 개인이 방역지침을 잘 지키지 않아서가 아니라 사람들마다 천차만별인 지역사회에 대한 인식에 있다고 보고 있다. 앞에서 말했듯이 지역사회라는 것은 사람들마다 각기 다른 인식과 생활환경, 문화적 특성에 따라 그 개념이 달라진다. 어떻게 보면 우리나라에는 5천만 개가 넘는 지역사회가 존재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사람들 개개인마다 각자 다른 형태의 지역사회에 살고 있는 셈인데 일정한 기준도 없이 일률적으로 개인의 지역사회를 통제하기란 불가능할 것만 같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마주하고 있는 지역사회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방역은 방역전문가에게, 지역사회는 지역사회전문가에게 맡기면 되지 않을까? 사회복지사를 지역사회전문가라고 말하기에는 뭔가 좀 부족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아니라고 하기에도 자존심이 상할 일이어서 ―여하튼 우리들(?)끼리는 서로 그렇게 부르고 있으니까― 사회복지사로서 지역사회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아둘 필요는 있겠다.
커뮤니티와 소사이어티
지역사회는 사전적 의미로 ‘지역(local)’과 ‘사회(society)’의 합성어다. 지역(地域)은 땅의 경계 즉, 산이나 강, 하천 등 자연적 환경에 의해 구분되는 지리적인 의미를 가진다. 현대사회에서는 국가단위로 정치적 또는 행정적 영역으로 구분되기도 하고, 역사적으로 동일한 문화나 민속, 경제활동지역으로 구분되기도 한다. 그리고 사회(社會)라는 것은 사람들이 무리를 지여 거주하는 집단 또는 그러한 환경을 의미하는데, 단순히 사람들이 모여 산다고 해서 사회가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가치관과 규범, 문화 등을 서로 공유하면서 법(규칙)과 제도 등을 갖추고 질서를 유지하며 생활하는 집단(또는 공동체)을 의미한다.
여기서 우리는 ‘지역사회’가 갖는 두 가지의 중요한 특성을 찾을 수가 있다. 그것은 바로 지역성(locality)과 공동체성(communal nature)이다. 과거에는 (내가 살았던 아랫마을처럼) 촌락을 이루며 살았던 터라 지역 간의 경계가 비교적 명확했다. 사람 간의 관계도 혈연(血緣)과 지연(地緣), 동일한 경제활동을 통해 다른 지역사회와 확연히 구별되는 공동체적 특성을 모두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교통과 통신이 발달되면서 지역의 경계는 무너지고, 사회는 회사나 도시, 국가, 조직, 정당 등으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더군다나 사람 간의 관계마저도 계약이나 협정에 의해 인위적이고 일시적인 공동체로 변모하고 말았다. 그야말로 ‘공동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다. 오늘날 지역사회는 예전처럼 자생적·자연적 단위가 아니라 인위적이고 행정적·정치적 지배의 단위로 사용되고 있을 뿐 큰 의미가 없다. 크게는 국가 또는 민족국가의 형태로 나누거나 아니면 그 속에서의 행정적 구분, 즉 특별시·광역시·도·시·읍·면의 형태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 요즘의 지역사회다. 그렇게 인위적으로 선을 그은 구획들을 과연 진정한 의미의 지역사회라고 부를 수 있을지 의문이다.
독일의 사회학자 페르디난트 퇴니스(Ferdinand Tönnies, 1855-1936)는 전통적으로 다른 사람과의 공감(애정)을 통해 자연적으로 결합된 집단을 ‘공동사회(Gemeinschaft, 영어로 community)’라 했고, 반대로 개인이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결합된 집단을 ‘이익사회(Gesellschaft, 영어로 society)’라고 했다. 그리고 사회는 공동사회에서 이익사회로 발전해 나간다고 주장한 바 있다. 실제로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렇게 변했다. 퇴니스의 말처럼 현대사회는 이익사회(society)가 지배하고 있다. 인정하기 싫지만 슬프게도 이익사회에는 공동체(community)가 없다. 다만 이익사회에는 공동체를 대신할 조직(association)이 있을 뿐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사회를 가만히 지켜보면 (전통적 의미의) 공동체는 온데간데없고 서로 간의 이익을 위해 한 데 뭉친 조직들만이 난무하고 있을 뿐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우리는 지역사회를 부를 때 커뮤니티(공동체)라고 별 생각 없이 말한다. 조직만 있고 공동체가 없는 지역사회를 커뮤니티라고 낯뜨겁게도 계속 부르고 있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와 지역사회, 그리고 공동체
나는 코로나-19가 지금까지도 완전히 끝나지 않는 이유를 다름 아닌 지역사회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결여됐기 때문이라고 본다. 사람들 간에 공동체 감정(community sentiments)이 없는 지역사회는 진정한 의미의 커뮤니티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나 하나쯤이야 괜찮겠지”, “국가(정부)에서 알아서 잘 하겠지”, “나만 아니면 돼” 같은 개인의 이기주의가 이번 사태를 더 크게 만든 원인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더 안타까운 것은 국가(정부)가 이러한 지역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이다. 이번 코로나-19 대응만 보더라도 정부가 지역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그대로 드러난다. 정부는 코로나-19의 지역사회 감염확산을 막기 위해 중국이 우한을 폐쇄했던 것처럼 우리나라도 대구를 폐쇄했고, 제주도는 대구에서 오는 비행기를 막았다. 나는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그런 와중에도 어차피 가야할 사람은 갔고, 올 사람은 어떻게든 오고 있는데 말이다. 그것은 바이러스의 지역사회 확산을 막고자 한 조처가 아니라 단지 더 이상 책임질 일(지역)을 만들지 않겠다는 지극히 공무원적인 발상이었다. 지역사회라는 것이 반드시 도시와 국가를 구분하고 육지와 바다를 나누는 경계만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 아닌데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위적으로 선을 긋고 만들어 낸 지역사회를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정말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언제부턴가 (왠지 알 것 같지만) 우리나라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강조되면서 국가재정부담을 축소시키는 방안으로 지역사회를 잘 활용하는 것이 주된 정책적 관심사가 되었다. 지역사회를 관리와 통제의 대상으로만 보다보니 공동체는 오히려 거추장스럽고 정책을 추진하는데 방해만 될 뿐이었다. 결과적으로 신자유주의는 개인의 이기주의를 넘어 지역 간 이기주의를 부추겼다. 사회정책이 공동체에는 관심이 없고 젯밥(실적 또는 책임회피)에만 관심이 있는데 지역사회가 제대로 기능할 리 없다. 공동체(를 위한) 감정을 잃어버린 지역사회는 알맹이가 없는 쭉정이에 불과하다. 그나마 최근에 사회복지관이나 지역자생단체들을 통해 지역사회의 공동체를 회복하려는 노력을 하고는 있지만, 사실 거기에도 공동체는 없고 공동체를 닮은 조직(association)을 위한 조직화(organizing)에만 매진하는 것 같아 안타까울 따름이다. 말 그대로 공동체 회복은 원래 있던 것을 회복하는 것이지 새로운 조직을 만드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공동체 회복을 위한 사회복지사들의 노력을 폄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일을 함에 있어서 ‘지역사회’와 ‘공동체’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우리가 살고 있는(또는 일하고 있는) 지역사회가 진정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한 번쯤 진지하게 고민할 때다.
시골쥐와 서울쥐
나는 가끔씩 서울에 사는 친구들이 놀러 와서 제주도에 대해 잘 모르면 ‘서울 촌놈’이라고 놀릴 때가 있다. 서울처럼 대도시를 지역(local)의 관점에서만 보면 틀린 말일 수 있지만, 사람들이 모여 사는 작은 공동체들의 집합으로 보면 틀린 말도 아니다. 개개인은 누구나 혈연관계든, 지역관계, 또는 이익관계든지 모두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다. 그 공동체가 서울에 있던지, 안동에 있던지, 제주도에 있던지 지역의 차이만 뿐이지 우리는 모두 촌(村, 마을)에 사는 촌놈이다. 촌놈은 마을사람 즉, 다시 말해 주민(住民)이다. 사실 현대사회에서 도시와 시골을 구분하는 것도 별 게 아니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촌)들이 빽빽이 붙어서 경계가 불분명해지면 도시가 되는 것이고, 마을끼리 서로 듬성듬성 떨어져 있으면 시골이라고 부르겠지만 각각의 공동체만 놓고 보면 다 같은 촌(마을, 동네)이긴 마찬가지다.
세상이 워낙 각박해지다보니 마을과 동네(전통적 의미의 공동체)는 사라지고, 지역사회라는 것도 어디가 어디인지도 모르고 사는 이상한 사회(society)가 돼버렸다. 그러다보니 지역주민이라는 개념도 그냥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住民)일 뿐이지 지역사회의 주체가 되어 공동체를 지켜나가는 진정한 의미의 주민(主民)은 없는 것 같다. 우리는 누구나 주민(住民)이지만 동시에 모두가 다 주민(主民)이 아닌 뭐 그런.......
코로나-19의 해결도 ‘사회적 거리두기’니 ‘생활 속 거리두기’니 하면서 지역사회의 경계가 애매모호한 정책보다는 내가 살고 있는, 또 내가 속한 가장 작은 공동체의 방역이 최선이다. 그렇다고 마을단위로 소독약을 뿌리자는 것이 아니라 내 가족, 내 이웃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하는 진정한 공동체 문화를 형성하자는 의미다. 우리가 지역사회를 커뮤니티라고 부르듯이 지역사회는 내가 주인인 공동체다. 나의 공동체를 지키는 것이 곧 우리 모두의 지역사회를 지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원래 옛날부터 그런 나라가 아니었던가.
...누구나 공동체의 일원이면 모두 촌놈... 알쓸복잡
※ 참고문헌: 류진석 (1997). 지역사회의 개념과 지역사회복지모델. 장애와 고용, 7(3), 50-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