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복지는 어떻게 사회서비스가 되었나?
얼마전 국회에서 '사회서비스 지원 및 사회서비스원 설립에 관한 법률안(일명 사회서비스원법)'이 통과됐다. 2018년 법률안이 처음 발의된 후 거의 4년만에 일이다. 그 동안 사회서비스원이라는 새로운 공공기관의 설립을 두고 한참동안 갑론을박 말이 참 많았었다. 결과적으로는 민주주의의 꽃인 다수결에 따라 법이 통과되긴 했지만 그 과정을 지켜보는 사회복지사의 입장에서는 고구마를 100개나 삼킨 것처럼 가슴이 답답한 심정이었다. 내가 여태껏 우리나라 정치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면 뭔가 새로운 정책하거나 기존의 것을 개선하려는 시도를 하면 어김없이 반대하는 세력이 등장하는 것 같다. 이번 사회서비스원 설립에 관한 논란도 별반 다를게 없었다. 비단 정치권뿐만 아니라 사회복지계 내부에서도 찬반이 극명하게 갈렸다. 어떠한 중요한 선택을 두고 찬성과 반대가 나뉘어서 논쟁을 벌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국민의 삶과 가장 밀접하게 관련된 사회복지 정책은 두말 할 나위가 없겠다. 그런데 나를 가장 답답하게 한 것은 정작 새로운 정책을 이용해야 할 당사자인 일반 시민들은 이러한 찬반논쟁에서 빠져있다는 사실이었다. 심지어 시민들은 사회서비스가 무엇인지, 사회서비스원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 관심조차 없었다는 점이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이다. 새로운 사회복지 정책의 실행을 두고 서비스를 받아야 할 시민들은 쏙 빼놓고 제공하는 사람들끼리 서로 다투는 모습은 마치 남자에 대해 1도 관심이 없는 여성을 두고 두 남자가 서로 결혼을 하겠다고 싸우는 꼴이라고 할까.
사회적 이익과 개인적 이익
내가 이번 사회서비스원 논란을 옆에서 지켜본 바로는 찬반양측이 서로 놓치기 싫은 무언가를 지키기위해 애를 쓰는 것처럼 보였다. 사회복지라는 양(羊)의 탈 쓰고 속으로는 사회(또는 시민의) 복지가 아닌 자기자신의 복지(이익)에만 혈안이 된 것처럼 말이다. 그들에겐 사회복지는 그저 생존을 위한 먹잇감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것인가. 나는 사회복지사로서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공익을 위해, 더군다나 시민들의 복지를 위해 설립되는 공공기관이 설립되는 것이 도대체 누가 이익을 보고, 또 누가 손해를 본다는 것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당연히 이익은 시민이 얻는 것이고, 손해는 정부가 책임지는 것이 공공기관이 아니던가. 그런데 이런 어처구니가 없는 논쟁은 법이 통과된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 대한민국 사회복지의 현실이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사회복지의 역사는 민간 사회복지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회복지 정책은 정부가 만들고 있지만 그 실행은 민간에서 주도하고 있다. 공공의 서비스가 민간에 의해 제공된다고 해서 민간 서비스가 되는 것이 아닌데, 아이러니 하게도 지금까지 우리나라 사회복지서비스는 민간에 위탁되는 순간 사유화되고 말았다. 그래서 사회복지의 공공성 논란은 지금까지 오랜시간 계속되어 왔다. 아마 사회복지서비스를 민간에게 위탁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논란은 이미 시작됐을 수도 있겠다. 그걸 이제와서 정부가 관행을 바꿔보겠다고 사회서비스원 카드를 꺼내 든 것이 오히려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 꼴이 됐다. 민간의 입장에서는 이유가 어째됐건 간에 지난 수십년 동안 (위탁받아) 잘 운영해 온 사업을 뜬금없이 공공에서 주인행세를 하려고 하니 몹시 못마땅할 수도 있겠다. 나도 민간 사회복지기관에서 오랜시간 일을 해 왔던터라 이런 상황이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어차피 사회복지는 공공의 서비스인 걸 사회복지사의 입장에서 반대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사회서비스원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민간 사회복지법인의 대표나 기관장들이나 반대하지 일선의 사회복지사들은 오히려 반기는 분위기다.
사회복지와 개인의 이익. 왠지 모순되는 단어의 조합이지만, 바로 이러한 모순이 오랫동안 현실이 되어 왔기 때문에 사회서비스원라는 생경한 공공기관이 설립된 배경이기도 하다. 지금도 여전히 반대와 우려의 목소리가 많긴 하지만 되면 좋고, 안되면 말고라는 식의 반대는 얼마가지 못하고 곧 사그라들 것으로 예상된다. 시민의 사회복지를 두고 제3자들끼리의 소모적인 논쟁을 언제까지 할 지 참 걱정이다.
그나저나 이제 사회서비스원이 설립될 법적근거는 마련됐다. 이제 전국에 사회서비스원이 순차적으로 설립될 일만 남았다. 절반은 이미 설립돼서 운영 중에 있기도 하다. 그런데 나도 사실 몇 가지 궁금한 것이 생겼다. 도대체 사회서비스가 뭐지? 사회복지는 제쳐두고 사회서비스라는 말은 어디에서 왔을까? 정작 사회서비스를 이용해야 할 시민들은 사회서비스원이 생긴다는 걸 알고는 있긴 한 걸까? 사회복지사인 나도 잘 모르겠는데 남 걱정할 때가 아닌 것 같다. 이 참에 나도 한번 차근차근 알아볼 필요가 있겠다.
사회서비스란 무엇인가?
우선 사회서비스가 무엇인지부터 알아봐야 겠다. 사회서비스는 말 그대로 사회적으로 제공되는 서비스라 하겠다. 사회적으로 제공되는 서비스라고 하면 보통 인간이 태어나서 생애주기별로 제공되는 공공의 서비스라고 보면 되는데, 지금까지 우리는 보통 그걸 사회복지(사업 또는 서비스)라고 알고 있다. 예컨데, 생애주기별로 제공되는 되는 서비스는 임신과 출생 단계에서 난임을 지원하는 서비스라던가 임신부나 신생아의 건강관리를 지원하는 서비스 등이 있다. 그리고 영유아 단계에는 어린이집과 같은 보육 서비스, 아이돌봄 등의 서비스가 있으며, 아동 및 청소년 단계에는 지역아동센터나 방과 후 돌봄, 심리상담 서비스 등도 있다. 성인이 된 이후에는 취업지원, 노후 설계 지원, 건강관리 등에 관한 서비스가 있다. 노년 단계에는 장기요양, 노인돌봄, 치매돌봄, 노인 일자리, 노인 건강관리 등의 서비스가 있다. 또 죽음에 이르는 단계에서도 호스피스나 장례 등의 서비스까지도 포함된다. 정말 북유럽 복지국가에서나 들어봄직한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말이 우리나라 사회서비스정책에도 고스란히 엿볼 수 있다.(*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이렇게만 보면 사회서비스가 아니라 그냥 사회복지서비스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은데 굳이 복지라는 말을 빼서 차이를 두는 이유가 뭘지 궁금해진다. 우리나라 사회서비스정책을 담당하는 보건복지부에서는 사회서비스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 개념 : 국가별, 학자에 따라 다양하게 정의되고 있어 포괄하는 범위도 다양
-(광의) 사회서비스는 개인 또는 사회 전체의 복지 증진 및 삶의 질 제고를 위해 사회적으로
제공하는 서비스로서 사회복지, 보건의료, 교육, 문화, 주거, 고용, 환경 등을 폭넓게 포함
-(협의) 노인, 아동, 장애인 등을 대상으로 한 돌봄 서비스를 총칭
넓은 의미에서 사회서비스는 사회복지와 보건의료, 교육 등을 포함하는 것으로 개념정의를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소심하게도) 국가나 학자마다 다양하게 정의되고 있다는 단서를 달고는 있지만 말이다. 그런데 보건복지부의 개념정의에 따르면 사회서비스는 사회복지보다 상위개념에 속하게 된다. 그러고는 사회서비스의 목적을 사회 전체의 복지증진이라고 한다. 목적으로서 사회복지와 수단으로서 사회복지를 혼용하고 있는 것이다. 아... 탄식이 절로 나온다. 출생의 비밀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처럼 비극은 따로 없을 것이다. 필자가 예전에 사회복지와 사회보장의 차이에 관한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사회서비스를 설명하느라 다시 그때로 돌아가야 하는 것인지 막막한 생각이 든다. 간략하게 다시 설명하자면, 사회복지는 모든 복지정책이 지향하는 목표이고, 사회보장은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사회적 안전장치 즉, 수단이다. 사회서비스도 시민의 복지증진을 위한 수단이므로 사회보장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사회서비스는 사회적으로 꼭 필요한 (사회보장)서비스인데 돈이 되지 않기 때문에 민간기업에서 참여를 꺼려하기 마련이다. 그걸 정부나 지자체에서 국민의 세금으로 마련한 보조금을 주면서까지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간병·가사·간호·보육·노인요양 서비스, 저소득가정 아동·장애인 등에 대한 교육 서비스, 문화·환경 관련 서비스 등이 사회서비스에 포함된다.(*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우리나라의 사회복지가 공공의 서비스로 자리잡게 된 시기는 1970년대 이후라고 볼 수 있다. 1970년 사회복지사업법이 제정되면서 민간 사회복지법인 설립이 본격화되었고, 이전까지 진행되어오던 사회사업으로서의 사회복지가 제도적 개념으로 전달체계로서의 인식으로 차츰 변화하게 되었다. 1980년 이후 사회복지는 이러한 공공성의 확장으로 인해 관련법들을 재정비하고 국가의 책임정책으로 발전하면서 사회복지에 대한 인식은 점차 국가적 차원의 사회보장과 동일한 의미로 전환되기 시작한다.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사회보장으로서의 사회복지 인식은 점점 더 확장되었다. 급기야 2012년 개정된 「사회보장기본법」에서는 기존의 사회(복지)서비스를 모두 포괄해 ‘사회서비스’라 하고, 사회복지서비스는 사회서비스의 한 부류로서 단지 복지분야에 대한 서비스로 한정하는 것으로 규정하기에 이른다.
그래서 현대의 사회서비스는 전통적인 사회복지서비스와 분명한 선을 긋고 있다. 기존의 사회복지서비스는 국가가 대상자를 직접 선별하여(특히, 가난한 사람을) 전액 국비로 기본적인 생활보장 서비스를 제공했다면, 요즘의 사회서비스는 지역사회를 기반으로 중산층까지 그 대상을 확대하고 기본적인 생활보장 이외에도 일상생활을 지원한다거나 인적자본 확충 등의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며 이에 필요한 비용은 본인이 일부 부담하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사회복지서비스가 서비스의 대상이 일부 빈곤층에서 중산층까지 확대되면서 사회서비스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사회복지서비스 vs 사회서비스
그렇다면 사회복지서비스는 왜 굳이 사회서비스가 되야만 했을까? 사회서비스는 사회복지서비스가 아닌가? 사회복지서비스는 사회서비스가 아닌가? 결국 보건복지부의 말마따나 사회복지의 대상은 가난한 자에 한정된 것인가? 나는 직업이 사회복지사이지만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스스로 자괴감이 든다. 사회복지서비스가 사회서비스가 된 이유는 결국 사회복지를 가난한 자만을 위한 보충적인 관점으로만 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걸 사회가 경제적으로 발전하면서 일반(먹고 살 만한) 국민들에게까지 서비스를 확대하려다보니 가난한 의미의 사회복지를 빼버린 것은 아닐지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 사회가 6.25 전쟁의 아픔을 딪고 불과 30년 만에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룩했고, 그 결과 사회복지제도 또한 비약적으로 발전해 왔다. 하지만 제도만 복잡해지고 다양해졌지 위정자들이나 시민들의 사회복지에 대한 인식은 아직도 70년 전 전쟁 직후와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사회복지서비스이건 사회서비스이건 둘 다 사회적으로 반드시 필요한 서비스인건 예나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그 옛날에는 국가가 돈이 없어서 일부 가난한 사람만 선별해서 최소한의 서비스를 제공할 수밖에 없었던 것 뿐이지 대상이 달라진다고 서비스가 바뀌는 것은 아니란 말이다. 사회복지서비스는 예전에도 사회복지서비스이고 지금도 그렇다. 그건 사회서비스라고 이름만 바꾼다고 될 일이 아니다.
이제 곧 전국에 사회서비스원이 생겨서 본격적인 운영에 들어갈 것이다. 지금까지 시범사업으로 운영된 지역의 사회서비스원이 해왔던 일들을 보면 기존에 있던 사회복지기관과 특별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소위 전문가라는 사람들은 그 원인을 아직 명확한 운영지침(매뉴얼)이 마련되기 전이어서 그렇다고 애써 말할 수는 있겠다. 하지만 나는 문제의 원인이 다름아닌 공공성에 있다고 본다. 사회(복지)서비스의 공공성에 관한 인식 말이다. 사회(복지)서비스가 공공기관에서 제공하면 공공의 서비스가 되고, 사회복지법인에서 제공하면 민간서비스가 된다는 어처구니 없는 발상이 문제다. 민간 사회복지법인에서 문제가 된 사회서비스를 공공기관에서 매뉴얼에 따라 제공하게 되면 저절로 공공성이 높아진다는 말인가. 민간 사회복지법인에서 일하던 사회복지사가 공공기관에서 일하면 사회복지사 아니라 공무원이 되는 것인가 말이다. 결국 사회(복지)서비스는 휴먼서비스다.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도 사람이고, 서비스를 받는 것도 사람이다. 사회복지는 그 자체가 공공재다. 마치 어두운 바다를 밝히는 등대처럼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공의 서비스를 민간기관에서 제공하든 공공기관에서 제공하든 무한한 책임감과 사명감을 가지고 일해야 한다. 그리고 사회에서 필수이고, 기피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예우와 처우는 국가가 책임지고 보장해 주어야 한다. 그게 바로 공공성이다. 앞으로 더이상 사회(복지)서비스의 공공성을 두고 공공과 민간이 다투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사회복지 공공성 논란의 중심에 선 사회서비스원의 역할이 기대가 된다.
기대 반 우려 반... 알쓸복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