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황순원, 소설, 국어국문학, 학마을 사람들

220326의 기록

by 엉망

#1

한동안 일기를 쓰지 않았다. 동거인이 코로나19에 걸려서 한동안 고생했다. 감기 수준이 아니라, 꽤 많이 아팠다. 지난 이틀간은 거의 음식도 먹지 못했다. 목이 많이 부어서 고통스럽다고 했다. 확진자가 크게 늘어난 탓에 특별한 일이 아니게 되어버렸지만, 전염병은 전염병이다.

간병도 해야하고, 확진 직전까지 어차피 계속 붙어있었기에 특별히 격리하지 않은채 지냈다. 어차피 걸릴거라고 생각해서였다. 그런데 나는 동거인이 확진 5일째인 오늘까지도 전혀 증상도 없고, 신속항원검사에서도 계속 음성이 나온다. 진정 슈퍼면역자인 것일까. 아니면 내 몸에 온 바이러스마저도 게을러서 천천히 천천히 감염되고 활동하고 있는 것일까. 신기한 일이다.


#2

날씨가 꽤 따뜻해졌다. 어느새 또 봄이낙보다. 한바탕 봄비도 내렸다. 뭘하든, 아무것도 안하든, 시간은 계절은 참 잘도 간다. 어느새 결혼식이 한달 앞으로 다가왔다. 싱숭생숭하다. 매리지블루인가 뭔가가 의심된다. 원래 없는 의욕이 더욱 바닥을 치고 있다. 며칠사이에 당장 급한 업무들, 그리고 손대기 싫어서 묵혀뒀던 업무들을 대강 다 처리해서 뭔가 긴장감이 더 떨어지는 기분이다. 조금 더 힘을 내야겠다.


#3

오늘의 인물, 무려 107년 전 오늘(자정이 넘었으니 정확하게는 어제), 1915년 3월 26일 태어난 황순원 소설가다. 인터넷을 보다 우연히 그의 탄생일이 3월 26일이란걸 알게됐다. 거목으로 불리기에 어색하지 않은 작가인만큼, 교과서에 그의 작품이 많이 실려있다. '소나기'나 '학' 같은 작품이 대표적이다. '소나기'야 전국민이 다 아는 소설이지만, '학'은 솔직히 잘 기억이 나진 않는다.

대신 뜬금없지만, 불현듯, '학마을 사람들'이란 소설이 떠올랐다. 황순원 작가의 작품도 아니다. 스스로 생각해도 황당한 브레인스토밍이긴한데, 아무튼 '학마을 사람들'은 좀 특별한 소설이다. 그닥 공부를 좋아하지도 않았고 장차 진로에 대한 원대한 포부도 없던 나였지만, 대학 전공을 택할 때는 망설임이 없었다. 무조건 국어국문학과를 가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유는 책 읽는게, 특히 소설 읽는게 좋아서였다.

근원을 더듬어 보자면 초등학교 1학년 여름 방학에 읽은 무슨무슨 '만화일기'도 나올테고, 다 바스러질 듯한 누런 종이로 제본된 채 아버지의 책장에 꽂혀 있었던 '서유기'도 나올거다. 그러나 중학교 어느날인가 수업이 너무 지겨워 교과서를 뒤적거리다 읽기 시작했던 '학마을 사람들'의 기억 역시 못지 않게 강렬하다. 그때의 기억이 2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할 정도다. '소설이, 심지어 교과서에 실린 소설이, 즉 청소년들이 읽기에 바람직하고 권장할 만하니까 실렸을 것이 분명한 한국의 단편소설이, 이렇게 재밌을 수 있다니.' 정도의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실제로 쉬지 않고, 수업이 끝날 때까지 단숨에 읽어나갔던 것 같다. 이후로 교과서의 다른 작품들도 거부감 없이, 재밌겠다는 기대를 갖고 읽어 볼 생각을 하게 된 것도 행운이었고. 물론 다 재밌었던 건 아니었지만.

아무튼 그 덕인지 그 탓인지 먹고사는데 전혀 도움은 안되지만 역설적으로,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먹고사는 길을 열어 준 그 전공을 망설임 없이 택하게 됐다. 또한 그 이후로도 변함없이 공부를 열심히 하지는 않았지만, 학창시절 내내 책을 읽거나 하는 것 자체에는 거부감이 없었다. 책을 많이 읽는 다는 건 곧 조금만 공부해도 최소한 노력한 것에 비해서는 더 많이 습득할 수 있게 하는, 즉 가성비를 높여주는 일인 것 같다. 동시에 조금만 알고도 많이 아는 척을 하게 하는데도 큰 도움을 준다. 먹고 사는데 도움이 안된다고 늘 들어왔고 스스로도 늘 말하지만, 실은 늘 도움받고 살고 있는 것이다.


#4

오늘의 인물에서 너무 멀리 와버렸다. 황순원 소설가는 작품도 하나하나 다 기념비적이지만, 삶도 기억할만하다. 동시대를 산 다른 수많은 작가들과 달리, 작품에 해가 되는 삶을 살지 않았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양심을 지킨 작가다. 서정주나 이광수처럼 친일 행적이 없다. 국가나 국민을 배신하지도, 반인륜적 전쟁 범죄를 찬양하지도 않았다. 그 엄혹한 시기에. 누군들, 어떤 작가인들 그보다 더 잘 살수 있었을까. 그런 시기에 말이다. 오늘 하루를 온전히 그를 기억하는데 써도 아깝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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