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 화이트데이, 망이, 망소이, 만적, 영웅

220314의 기록

by 엉망

#1

9일의 휴가가 끝나고 오랜만에 출근. 생각보다는 괜찮았다. 생각보다는. 밀린 업무를 꽤 많이 처리해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2

화이트데이였다. 집에 가기전에 뭐라도 사서 가야겠다는 생각을 여러번했는데, 일하다보니 결국엔 잊고 그냥 집에 와버렸다. 어리석고 또 멍청하게도. 미안하기도 하고. 곧 아내가 될 분께서 지난달 발렌타인데이 때 마들렌?과 초콜렛을 선물해줬었다. 흔히 파는게 아니라, 꽤 유명한 가게에서 산 거라고 했었다. 거기까지 부러 찾아갔을 그 길을, 그 발걸음을 생각하니 더 미안함이 커졌다. 다음부턴 꼭 잊지 않고 챙겨야겠다.

물론 다짐과 함께, 매년 생기는 궁금증이 올해도 역시 피어올랐다. 도대체. 도대체, 화이트데이는 누가 무슨 목적으로 만들었을까. 발렌타인데이도 그렇고. 악의적이다.


#3

그날의 인물을 선정해보기로 한다. 오늘은 세명이다. 요즘 습관적으로 켜놓는 역사프로그램의 등장인물, 바로 고려 시대에 난을 일으킨 망이와 망소이, 그리고 만적이라는 노비다. 고등학교 시절 역사시간 이후 거의 15년만에 다시 들은 이름이다.

이들의 이름 앞에 '역적'이라는 수식어를 썼다가 다시 고쳤다. 역적의 사전적 의미가 '자기 나라나 민족, 통치자를 반역한 사람'이어서다. 무신정변 이후 고려의 상황을 고려했을 때, 내 기준에서 그들이 자기 나라나 민족을 반역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당시는 백성, 특히 이들처럼 신분이 미천하거나 아예 천민인 경우에는 사실상 인간으로 취급받지 못한 걸로 보인다. 나라가 나라로서, 통치자가 통치자로서 최소한의 역할조차 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의 몸부림을 역사서나 교과서에선 역적으로 기록할 수 있을지 몰라도, 일개 시민인 나는 역적으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출근을 앞둔 새벽이라 자세히 적긴 어렵지만, 오히려 이후 역사에 미친 영향으로 볼 때 역적보다 영웅에 더 가깝다. 그들 삶 자체는 비록 처절하게 실패했지만, 이후 수많은 망이와 망소이, 만적들이 들고 일어났고, 거듭 실패했고, 결국 태어난 지역에 따른 차별이나 신분제는 사라졌다. 그들이 살았던 고려를 이어받은 나라에서는 헌법에 의해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하도록 하고 있다. 적어도 법적으로는.

물론 무장 봉기라는, 당시의 법에는 어긋나는 폭력적 수단을 통하긴 했지만, 제갈량이나 아인슈타인급 지능이라도 그들의 상황에서 폭력적 방법 이외에 다른 길을 찾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그들의 한계를 눈감아 주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아무튼 오늘도 쓸데없이 진지한 얘기로 흘러가 버렸지만, 세 사람 모두 죽음 이후에는 차별 없는 곳에서 살고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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