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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도 Jun 17. 2024

랩걸 내 동생

강산아, 유주가 중학생 되고 나니까 주말에도 집에 붙어있지를 않아.

시험 대비 학원 특강을 비롯해서 친구들과 동아리 활동이니 수행평가 준비니 약속이 많으시구나.

형은 대학 동창회 가고, 나는 막내 누나를 만나고 왔어.

줄기세포 연구하는 내 동생.

두 아들 키우느라 경력이 단절되어 일자리 구하는 것도 만만치가 않은데, 이제는 나이가 있어서 어떤 조직에서도 팀원으로는 일을 할 수가 없다는 거야.

천성적으로 전투력을 타고나지 못한 막내 누나, 나랑 완전 닮은 꼴이잖니.

육아 휴직 6개월 빼고는 일을 쉬지 않았던 나도 부장이 버거운데, 하물며 업계를 떠나 10년 넘도록 육아에 전념한 동생이 하루아침에 팀장 역할을 어떻게 하냐고.

난 생각만 해도 지레 포기각인데, 내 동생 꿋꿋하게 그 숨 막히는 공기를 견디며 출근하고 있는 거야.

요즘 MZ세대들 조금 무섭거든.

당돌하게 할 말 하는 것은 장점이라 하겠으나….

극단적 개인주의에 입각한 질문과 거절의 선을 넘어 예의, 배려, 공감 따위 안중에도 없는 태도.

무조건 스피디하거든.

욕심 없고 마냥 착하기만 한 내 동생이 텃세를 무릅쓰고 다시 일의 세계에 뛰어든 것이 짠하기 그지없구나.

새로운 조직에 몸담고 아는 사람 하나 없이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인 건데….

업무며 인간관계며 모르는 것 투성이이고, 그 판의 생리를 부지런히 읽어서 민첩하게 스며들기도 바쁠 텐데, 퇴근하면 다시 육아 전쟁이니 언제 책을 보고 무슨 연구를 하냐고.

 근데, 막내 누나 업계 얘기 들으면 무척 흥미롭다.

애초에 동생이 앞 못 보는 큰언니 생각해서 선택한 진로였잖아.

줄기세포 관련 보도와 실제 업계 상황을 같이 듣게 되니 신기한 것이 많아.

치매나 망막질환 치료제 임상 대상자를 모집한다거나 실험 비하인드 스토리 몇 조각을 듣고 있으면 그냥 딴 세상 얘기 같아서.

누나들 결혼하기 전에 실험용 흰 쥐가 탈출하여 수색작전을 펼친 얘기 들으며 얼마나 웃었는지….

그 옛날 아가씨 시절부터 내 동생 세포 배양한다고 주말도 없이 병원으로 출근했었어.

지방세포가 어쩌고 줄기세포가 어쩌고 원심분리가 어쩌고….

캬, 간지 나지 않냐?

대학원 다닐 때는 항상 실험실에서 살았거든.

너무 자연스럽게 이 큰언니가 선물했던 책.

『랩걸: 나무, 과학 그리고 사랑』

지은이: 호프 자런 ; 옮긴이: 김희정

 마치 영화 한 편을 본 것 같은 소설이었어.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어떻게 추는지 몰라.” 

빌이 말했다.

“출 수 있어.” 

내가 고집을 피웠다. 

“아직도 늦지 않았어. 자, 여기까지 왔잖아. 맙소사, 그게 바로 우리가 여기까지 온 이유였어. 이제야 알겠네. 바로 여기가 네가 춤을 출 곳이야.”     

신이시여, 순딩이 랩걸, 내 동생이 춤추며 날아오를 시공간을 부디 허락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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