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온수 메트는 가라.

by 밀도


추석 전으로 계획했던 공개수업이 정확히 한 달 미루어졌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지도안 짜기에도 탄력이 붙지 않았다. 마음에 부담만 안은 채 차일피일 시간을 흘려보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질 때가 되어서야 준비에 착수했다. 본시 학습 주제인콩팥에 대한 학생들 호기심을 자극할 수 있을만한 동영상을 찾아 편집하고, 검은콩 두유와 소금 등 관련 활동 준비물을 갖추었다. 호흡이 척 척 맞는 근로지원 장선생님 덕에 PPT 자료를 만들고 수업 장면을 촬영하고 유인물을 나누어 주는 등 시각적인 진행 과정이 매끄러웠다.

20년에 육박하는 교직 경력이 무색하게 나는 여전히 공개수업이 반갑지 않다.

부담감을 벗어던지고 싶어 10월 6일 5교시만 기다렸다.

토요일까지 연수 일정이 빽빽했다. 9월 말에는 코로나 시대에 걸맞게 온라인 기반 교내 이료경진대회를 진행하느라 분주했다. 졸업생 강의를 비롯 행정 업무 처리를 꼼꼼히 해야 하는 행사 계획서 제출이 줄줄이 이어졌다. 2학기 1차 고사 평가 서류 결재를 받아야 했고, 신학기 학생 모집 시즌이었으며, 학교 홍보 관련 라디오 인터뷰 일정도 잡았다. 외부에서는 EBS 화면해설 교육 방송 중등 사회 과목 검수 요청이 들어와 있었다. 그야말로 돌아서면 일이었다.

3월에 생애 첫 수필집을 출간하고 작가로서 인터뷰를 두 번 경험했다. 말하기에 내가 얼마나 서툰 사람인지 절감했다. 생방송 라디오 인터뷰 약속을 잡아 놓고 밤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스트레스 때문이었을까?

15년쯤 전에 디스크 초기 진단을 받긴 했지만 극심한 요통이 당혹스러웠다.

허리를 펼 수 없었고 뜨끈한 메트 위에 눕고만 싶었다. 생전 처음 내 손으로 파스를 샀고, 내 발로 한의원을 찾았다. 주말까지 착실하게 한의원에 가서 크고 두꺼운 침을 맞았다.

열흘이 넘도록 통증은 가시지 않았고, 몸이 괴로우니 만사가 피곤했다.

저녁 먹는 것도 귀찮아서 선식으로 때웠다. 퇴근하자마자 침대로 기어들기 바빴다.

초등 4학년 유주 식사를 친정어머니가 챙겨 주심이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뜨거운 메트에 등을 붙이고 누워서 화면해설 드라마를 들었다. 끝 간 데 없이 낙하했다.

책도 글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5킬로 속도로 걷던 러닝 머신에는 올라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겨우 3킬로를 맞춰 놓고 아픈 허리를 부여잡았다. 이를 악물고 거꾸리에 매달려 온몸의 근육을 이완시켜 보기도 했다.

통증이 가시지 않으니 덜컥 겁이 났다. 앉아 있는 것이 힘들어서 집안을 하릴없이 뱅 뱅 돌았다. 체중 관리를 하지 않아서 그렇다며 핀잔주는 남편 말씀이 지당하셨으나 당장 아픈 허리에는 아무 도움이 안 됐다.

저녁을 먹지 않아서일까? 바쁜 업무가 일달락되어서일까?

차츰 몸이 편해졌다. 허리가 펴졌고 의욕이 생겼다. 안도하니 글이 쓰고 싶었다. 책이 귀에 들어왔다. 허겁지겁 읽었다.

몇 날며칠 굶은 사람처럼 김범석이 쓴 에세이 『천국의 하모니카,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를 달게 들었다. 서울대병원 종양내과 의사인 저자 시선에 담긴 환자들의 세상. 소록도에서의 근무 경험과 개인적 사유가 따뜻한 문장에 녹아 있었다.

언제쯤이면 나도 이렇듯 링거액 같이 유익한 산문을 써낼 수 있을까?

이불속 나른한 독서가 좋다. 뜨거운 메트가 달콤하게 유혹한다.

아직 완전하지 않은 허리 건강을 위해 부지런히 걸어야 함에도 맥없이 침대를 택한다.

철퇴를 맞기 전에 일어서자. 걷자. 쓰자.

의미를 기워내는 삶일 수 있도록, 주제가 살아 있는 글일 수 있도록, 근력이 붙어 있는 몸일 수 있도록 지켜내 보자. 뿌리쳐 보자.

온수 메트야, 가라.

keyword
작가의 이전글쓰는 사람으로 더 견고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