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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싣고 온 글자동차

by 밀도

떨리는 가슴으로 수강을 신청했다. 네 번째 처음은 막막함 보다 설렘이 컸다. 기적의 증거처럼 아는 이름을 만났다.

하잘 것 없는 푸념이 수필이 됐다. 기록하는 행위를 통해 놀랍게도 감정이 수습됐다. 내 안에 낯선 욕망을 마주했다. 쓰지 않고서는 버텨낼 제간이 없었다.

첫 번째는 동서식품에서 주최하는 문학 멘토링 프로그램에 참여한 시도였다. 8주 간 온라인으로 글에 대한 첨삭과 간략한 코멘트를 받았다. 온라인 활동이었으므로 숨 막히는 용기가 필요하지는 않았다. 마지막 순서인 현장 특강에는 참석할 엄두가 안 났다.

행사 장소는 서울 합정동 어느 카페였고 이병률 시인, 조경란 소설가 강의가 예정되어 있었다. 마지막이 다가왔다. 못내 아쉬운 마음으로 행사 일정을 확인했다. 마침 8월 방학 중이었고, 경기도 광명 친정어머니 댁에서라면 참석이 가능할 것도 같았다. 실망할 것이 두려워 스스로에게 기대하지 말 것을 주문했다. 활동지원인이 섭외될 가능성은 희박했다.

며칠을 기다렸고 선물처럼 그날 지원인이 섭외됐다는 시각장애인복지관 연락을 받았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음률이 묻어나는 유려한 목소리로 이은선 소설가가 행사를 주관하고 있었다. 막 첫 소설집을 출간한 젊은 작가는 서슴없이 글 쓰지 말라고, 너무너무 외롭고 힘든 길이라서 하는 말이라며 목청을 높였다. 세월호 사건을 언급하며 공개 석상에서 찰지게 욕도 했다. 패기 넘치는 언사가 밉지 않았다.

이병률 시인 강의가 시작되고 강의실 전체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가장 앞자리에 앉은 맹인 수강생에게 시인은 “좋은 일만...”이라고 사인해 주었다.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고 마는 시각장애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장 공기에 매료됐다. 온몸이 뻐근하도록 피곤하고 긴장된 시간이었어도 살아 있는 것 같아서 좋았다. 순도 100% 내 의지로만 선택한 최초의 외출이었다.

두 번째는 우석대 평생교육 시창작반 수업이었다. 시보다는 수필을 배우고 싶었지만 당시 검색 데이터로는 야간 수강이 가능한 수업으로 유일했다. 무엇보다 우석대라면 직장에서 통학이 충분한 거리였으므로.

우석대 평생교육원이 삼례 아닌 전주 금암동에 위치해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가까스로 한 학기를 수강했다.

꿈같은 추억으로 남은 시간이었다. 종강파티에서 멋진 여성 문우님이 기타를 연주했고 시원한 맥주 건배가 즐거웠다. 각자 좋아하는 시를 소개하고 감상을 발표하는 시간에 나는 시 읽기를 좋아한다고, 시는 짤막짤막 마음을 치유하는 진통제 같다고 말했다.

그곳에서 수필 전도사 양*식 작가를 알았다. 전도사님 인도를 받아 신아문예대학에 등록했다.

세 번째 시작이었다. 김학 스승님께 처음 인사 올렸을 때 정적이 흘렀다. 낯선 출판사 건물 계단을 양작가님 팔꿈치를 잡고 올라갔다. 강의실 구조도, 출판사 출입문 위치도 알 수 없었다. 이동 차량을 마련하지 못해서 결석하는 날이 훨씬 많았다.

고즈넉한 저녁 시간, 각자 작품을 읽고 합평하는 한 시간 남짓 수업이 내 편협한 쓰기 영역을 확장시켰다. 지도 교수님의 애정 어린 핀잔까지도 자양분이었다.

쓴소리가 고마웠고 내 작품에 귀 기울여 주시는 문우님들 존재가 든든했다.

6년 공부하는 동안 난생처음 문학상을 받고 책도 냈다. 신아출판사는 내게 친정이요, 흰 지팡이였다.

네 번째 처음은 두려움 보다 설렘이 컸다. 내 속을 훤히 알고 계시는 한*선 교수님께 배울 수 있게 되어 감사했다. 온화한 시선과 깊은 통찰로 빚어내신 한 작품 한 작품에 감탄하며 『더듬이』 수필집을 읽었다. 문장에 스민 의미심장함이 버겁도록 충만했다.

김학 스승님 떠나시고 꽉 막혔던 글줄기가 아프게 열렸다. 한 마디 한 마디 내 심장을 충전하는 수필의 어머니 한 선생님을 추종하기로 작심했다.

고3 수업에 들어갔다. 시각중복장애 친구들 일곱 명이 공부하는 학급이다.

“엄마”를 가장 또렷하게 발음하는 열아홉 살 선재가 내게 자동차를 굴려 보냈다. 그전 시간에 가볍게 시도했던 자동차 놀이가 퍽 재미있었나 보다. 교사의 지시 없이 선재 스스로 보여준 첫 번째 의지였다. 자동차 놀이는 선재 몸과 마음을 자발적으로 움직이게 했다.

지독한 겁쟁이요, 포기 달인인 김밀도가 무려 네 번째 처음을 맞았다. 오롯이 내가 될 수 있는 쓰기가 나를 살린다. 타인에게 보이는 시각장애를 의식하지 않을 수 있게 하는 요술 파도에 몸을 씻는다. 밀물로 흘러드는 생경한 용기가 내 영혼을 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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