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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녀의 눈물

by 밀도

검은색 한복으로 상 주옷을 갖춰 입고 손님을 맞았다. 생경한 장소에서 친정 식구를 손님으로 마주하기도 처음이었다.

시아버님은 컴퓨터와 태블릿 같은 공학기기에 호기심이 많아 일흔이 넘은 연세에도 며느리에게 이메일을 하사하시는가 하면 우리 학교 홈페이지를 찾아 링크 하나씩 서투르게 클릭하며, 당신 평생에 한 점 접점 없었던 장애인 특수학교에 대해 관심을 보여 주셨다.

2007년 9월에 결혼한 후 한 달에 한 번쯤 시댁에 갔다.

“식사하셨어요?”

“그래 먹었다.”

“아버님 날씨가 추워요. 감기 조심하세요.”

“고맙다. 너도 조심해라.”

1분이면 족한 안부 전화가 쌓이고, 짧은 이메일이 쌓이고, 어색한 몇 마디가 쌓여서 ‘정’이 되었을까?

강건하셨던 아버님 몸에 담도가 막혀서 황달이 심해지고, 병원에 가는 날이 잦아졌다.

입원을 하고, 소화력이 떨어지고, 식사를 못하시는 날이 쌓이면서 점점 몸이 말라갔다.

가까이 사는 아주버님과 형님들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날이 늘었고, 어머님은 그야말로 아버님 수족이 되어 지극정성으로 간호하셨다.

중환자실로 이송되던 날, 아버님은 가쁜 숨으로 고맙다고, 행복하게 살라고, 하나밖에 없는 손녀 졸업하는 것도 못 보고 간다고 유언처럼 말씀하셨다.

보름이 지나 학년말 진급 사정회를 마치고 퇴근하는 길, 휴대폰에서 다급한 형님 울음소리가 쏟아졌다. 12월 21일 17시 7분 아버님이 운명하셨다고 했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어도 황망했다.

3일장을 치르는 동안 손주들은 각자 역할을 책임감 있게 수행했다. 장성한 오빠들 사이에서 유일한 초등학생인 딸아이가 신발 정리를 담당했다. 엉덩이에 땀이 나도록 의자에 붙어 앉아 조의금을 받고 기록한 오빠들만큼이나 딸아이 임무도 고됐다. 무엇보다 딸아이를 지치게 만든 것은 아빠를 비롯한 주변 어른들이 사방에서 쉴 새 없이 눈과 말화살을 날려댔기 때문인데, 그 화살촉이 다름 아닌 ‘엄마’, 그러니까 ‘나’였다는 것.

아이가 무언가를 먹고 있으면,

“유즈야, 혼자 먹으면 어떡해? 엄마는 밥 먹었어?”

아이가 잠깐 사촌들과 담소할라치면,

“유주, 엄마 옆에 딱 붙어 있으라고 했지?”

세상없이 유주를 사랑해 주는 이모들과 외할머니마저도.

“유주야, 엄마 잘 챙겨야 해.”

어려운 시댁 식구들 사이에서 의연한 척, 낯선 손님들을 응대하는데, 맹인스럽게 버벅거리고 싶지 않아 온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러느라 솔직히 딸아이를 챙길 겨를이 없었음을 쓰게 인정했다.

“유주, 힘들었지? 고생했네.”

“어, 나 사실 개 화나서 화장실 들어가 울었음. 아빠도 할머니도 이모들도 다 나한테만 엄마 챙겨라, 엄마 챙겨라.”

“그러게. 진짜 짜증 났겠다. 그 양반들이 다 왜 그랬대. 유주가 엄마도 아닌데. 그렇지? 다음부터는 그러지 않도록 엄마가 아빠부터 참교육시켜야겠다.”

“아, 네에 네에.”

“그런데 말이야. 아무리 개 화났어도 잘못된 정보를 유포하는 건 아니라고 봐. 고모가 엄마 밥 먹었냐고 물어봤을 때 너 엄마 밥 먹었다고 하더라. 나 저녁도 못 먹고 배고파 죽겠는데… 어머니 배고프면 얼마나 사나워지는지 너 알면서 그러냐? 앞으로 팩트체크만큼은 우리 제대로 하자고요.”

“아, 네에 네에.”

내 몸에서 소거된 시각은 시시때때로 육체와 정신을 분리시켰다. 특히 내가 돌봄 주체이고 싶은 순간, 그러니까 딸아이에게만큼은 도움이 되어주고 싶은 간절함이 복받칠 때면 사정없이 밀려드는 자괴감 때문에 숨이 막혔다. 번번이 상황 종료 후에야 아이 고충을 토닥거리는 수준으로 엄마 노릇을 해봐도 스스로를 안아줄 수가 없었다.

딸아이가 엄마 장애로 인한 불편한 감정과 경험에 매몰되지 않을 수 있는 유쾌한 사람으로 컸으면 좋겠다. 정서적 안정과 지지, 원초적 긍정과 웃음, 부드러운 스킨십에 힘쓰는 엄마는, 그래서, 외로워도 슬퍼도 최선을 다해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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