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눈 안에 남아 있는 학교였다. 교문을 들어서면 왼편으로 작은 운동장이 있었고, 그 끝은 층층이 돌계단 스탠드였다. 붉은 벽돌 건물들이 기억 속에 펼쳐졌다. 팀 대항으로 벌어지는 기마전을 응원하며 저 계단에 앉아 열심히 박수를 쳤던가?
고등학교 졸업 후 첫 만남이었다. 우연히 꾸려진 멤버는 그 시절 기숙사 룸메이트 후배와 1년 선배 언니 둘이었다.
엄마 따라온 6학년 혜지는 우리들이 보기 어려운 작은 글자 메뉴판을 줄줄 읽으며 키오스크 주문을 도맡았다. 오랜만에 마주 앉은 이모들이 폭풍 수다를 쏟아내는 테이블 한 구석에서 조용히 수학 문제를 풀다가 갑자기 박장대소했다. 분명 눈은 문제지를 보고 있는데, 두 귀는 우리 얘기를 다 흡수하고 있는 것이 놀라웠다. 5학년 아들은 옆 테이블에서 휴대폰 게임에 골몰하다가 문득 배고프다고 투덜거렸다.
우리 넷은 모두 맹학교를 졸업했다. 고등학교 교육과정에 이료 교과가 포함되어 있어 숙명처럼 안마를 배웠고, 국가 공인 자격증을 받았다. 네 여자 중 둘은 특수교사가 되어 맹학교로 돌아갔다.
상인들마저 맹인에게 익숙한 고향 같은 동네였다. 식객으로 붐비는 가락국수집에서도 혜지의 존재감은 컸다. 야무진 어린이 덕에 여나문 가지 메뉴를 맛봤다. 산책 겸 걷던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 모교로 향했다. 마침 그곳에 근무하는 선배 주머니에 교실 열쇠가 있었고, 무리 없이 토요일 낯 한산한 교문을 통과했다.
전국 모든 맹학교에는 임상 실습실이 있다. 졸업반 학생들이 지역 주민들을 대상으로 안마 실습하며 손맛을 키우고 피술자 응대 요령을 훈련하는 공간이다. 최신 장비를 갖추고 교사의 지도를 받아 실전처럼 임상 경험을 쌓는 학도병들의 최전선이라고나 할까.
학생 때는 별 관심 없었던 큼직한 기계들의 정체가 궁금했고, 20년 세월 동안 나도 모르게 친숙해진 기계들을 확인하며 반가움도 안도감도 스쳐갔다. 네 여자는 그야말로 물 만난 물고기가 됐다.
“언니, 여기 누워봐. 내가 어깨 만져줄게.”
“난 허리 교정해 줘.”
“이 기계는 뭐지? 와아, 톰슨 드롭다이 이거 괜찮네. 언니 침은 몇 호 써?”
“너는 1번 요추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 3번 중수골 후면에 자석 붙여봐.”
둘씩 짝이 되어 각자 아픈 곳을 주문하며 앓는 소리를 냈다. 시원해서 감격하고 쉴 새 없이 감탄했다. 서로의 필살기를 나누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도록 주무르고 누르고 돌리고 당겼다.
신이 난 이모들을 구경하며 호기심에 안마 의자니 마사지기를 체험하던 울퉁불퉁 훈이가 불쑥 한 마디 했다.
“엄마, 안마사들 모이면 이러고 놀아?”
그날 우리에게 안마는 틀림없는 놀이였다. 그것도 못 말리게 즐거운….
일터에서 짬짬이 허리며 어깨가 아프다고 찾아오는 동료들이 반갑다. 모닝 마사지로 부녀를 깨우는 새 아침 루틴이 좋다. 오롯이 손 끝 감각으로 근육 경결을 정밀 진단하고 푸는 몰입이 먹구름 같은 상념을 걷어낸다.
천하대장군 같은 장선배 오른손 엄지손가락 결절이 가슴 짠했다. 고된 노동 끝에 밀려오는 피로가 딱딱한 돌이 되어 쌓였을까. 우직하게 자기 길을 걷는 자들의 상흔은 훈장일지라도 안마사들의 망가진 관절은 퍽 슬프다. 학창 시절 그토록 배우기 싫었던 안마가 오늘날 내 특기요, 취미가 됐다.
인간이 환경의 지배를 받는 동물이라서 다행이다. 체념이면 어떻고 쟁취면 어떠랴. 중요한 것은 지금 나는 안마며 마사지가 재미있고, 시술 효과가 감지될 때 더없이 뿌듯하다는 사실이다.
볼 수 없는 사람의 생물학적 특성을 고려한 일본인의 교육적 발상은 적확했다. 일제 강점기 일본 맹인들을 가르치던 방식대로 우리나라 시각장애 직업교육이 체계화된 역사는 안마가 “백문이 불여일촉”을 외치는 자들의 천직임을 시사하므로.
‘헬스키퍼’, ‘경로당 안마’, 60세 이상 근골격계질환을 진단받은 환자나 뇌병변 장애인 등 안마 서비스 지원 대상 범위가 확대되고 있다. 직업인으로서 긍지를 가지고 성실하게 일하며 납세 의무를 다하는 시각장애 안마사들의 근무 환경과 기회가 더 확장되고 진화하면 좋겠다.
우리 졸업생들이 보통 근로자로 녹아 이 사회 곳곳에 온전한 구성원으로 스며들 수 있으면 참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