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리고 있어 예정됐던 체육대회를 강당에서 강행했다.
실내는 비좁았고, 오밀조밀 단체 공 굴리기가 진행되고 있었다.
소음이 범람하는 실내에 앉아 있기는 내게 고문과도 같았다.
담임하고 있는 학생들이 있는 한 꼼짝없이 임장해야 하는 시간, 아침부터 마음을 단단히 먹고, 강당 구석 바닥에 한소네를 들고 주저앉았다.
솔직히 승부에는 관심도 없었다. 다만 그 시끄러운 공간에서 빨리 탈출하고 싶은 마음만 굴뚝같았다. 심드렁한 표정, 주변 상황과는 아무 상관없이 한소네로 무언가를 읽고 있는 선수, ‘비협조’를 작심한 반항아가 따로 없었다.
단체 공 굴리기 시합이 시작됐고, 바쁘게 나를 부르는 동료 목소리가 들려왔다.
근로지원인에게 한소네를 맡기고 어색하게 서서 굴러오는 공을 토스했다.
학교에서 내 서류 업무를 보조해 주시는 근로지원인이 내 곁에 붙어 서서 한껏 겨강된 목소리로 외쳤다.
“선생님 공 오고 있어요. 오고 있어요.”
그렇게 지원인의 눈이 내 시합에 꽂혀 있는 사이, 우리 반 공주가 넘어진 것이다.
공주는 오른쪽 편마비가 있다. 걷는 속도도 느리고 발음도 어눌하다.
20대 후반, 건강한 몸으로 도서관에서 일하다가 넘어져 뇌진탕이 왔고, 며칠을 병원에서 의식 없이 누워 있다 깨어나 보니 시력도 기억도 이전과는 달라져 있었다고 했다.
젓가락 같이 마른 몸에 혼자 걷는 것도 힘에 부쳐하는 사람이 과연 안마를 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지만, 본인은 입학 의지가 확고했다.
1차 고사 볼 때는 모든 과목 요점정리 녹음한 파일을 반복해서 들으며 기세 좋게 공부했고, 만족스럽지 않은 점수 앞에서는 자못 진지한 태도로 교사에게 사과를 하기도 했다.
체육대회 현장, 발달장애가 있는 초등부 꼬마 녀석이 소란스러운 분위기에 흥이 난 나머지 혼자 춤을 추며 뛰어다니다가 우리 반 공주를 맥없이 드리 받았다.
한쪽 다리가 부실한 공주는 그대로 쿵 바닥에 쓰러졌고, 통증은 쉬 가실 것 같지 않았다.
다행히 뼈에는 이상이 없는 것 같아 함께 조용한 실습실로 이동했다. 멍든 무릎에는 아이스팩을, 뻐근한 허리에는 온열치료기를 대 주었다.. 이내 잠이 든 공주 곁에 앉아 있으려니, 내 귀에 비로소 고요가 차 올랐다.
‘그 많은 사람 중에 왜 하필 다리도 부실한 우리 반 공주를….
그 녀석 케어하는 도우미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길래 이 사달을 만드나.’
주말 저녁 공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절대 무리하지 마시고, 며칠 집에서 쉬셔도 좋을 것 같아요.”
엉덩이가 아파 착석이 힘들다고 했다. 교실 뒤켠에 서서 수업을 듣겠다며 꾸역꾸역 등교했다.
학생으로서 매우 훌륭한 태도라고 칭찬하면서도 내심으로는 ‘굳이’라는 단어가 꿈틀거렸다.
“나는 평생 개근상을 한 번도 못 받아본 사람이 돼놔서. 우리 서울대 갈 것도 아닌데….
살살합시다.”
“저는 개근상을 안 받은 적이 없었어요.
책도 못 읽는데 수업이라도 들어야지요.
여기 뒤에 서서 듣고, 주요 과목만 녹음해서 병원 갈게요.”
우리 반에서 홍일점인 그녀는 어눌한 발음으로도 늘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특유의 밝은 에너지로 남학생들과 무람 없이 어울렸고, 그런 그녀 덕분에 내가 안마 실습을 끌고 가기가 한결 수월했다.
“병원 잘 다녀오시고, 찜질 챙겨서 하셔야 해요.
왜 그 녀석은 하필 수영 씨에게 부딪혀 가지고.
나 같은 사람이었으면 그 꼬맹이가 튕겨 나갔을 텐데.
가뜩이나 근력도 약한데 이런 일 당하게 해서 미안해요.”
“그 꼬마라고 그러고 싶어 그랬겠어요. 괜찮아요. 약 먹고 찜질하면 좋아지겠지요.”
‘이런 아량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
내 잘못도 아닌데, 병원 들락거리며 아파서 고생하는 상황이면 나는 앞뒤 없이 짜증부터 났을 텐데….’
번번이 성인 남학생들의 ‘쾌’와 ‘불쾌’ 사이, 아슬아슬한 농담을 지혜롭게 받아넘겼다.
급우들 생일을 두루 살폈고, 생소한 의학 용어를 소리 내어 암기하며 면학 분위기를 조성했다. 공주님과 졸개들 사이 티키타카는 우리 반을 웃게 했고, 수시로 터지는 왁자한 폭소는 너와 나의 몸에 엔도르핀을 선사했다.
뾰족한 모서리가 덕지덕지 돋아난 교사와는 다르게 홍일점은 둥글둥글 각이 없다.
소심한 고슴도치 담임이 공처럼 둥글둥글한 공주 기운에 오늘도 묻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