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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 다지기

by 밀도

두 번째 책이 출간됐다. 계약을 하고, 원고를 쓰고, 교정을 보고, 표지 그림을 의뢰하고, 추천사를 받고, 제목을 정하고, 북디자이너가 완성한 최종 종이책을 만지기까지 꼭 1년이 소요됐다. 두 개의 방학을 갈아 넣고, 안내견 강산이와 함께 했던 예닐곱 사계절을 증명했다.

첫 출간과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쓰는 데에 혈안이 되어 미처 독자를 상정하지 못한 채 세상에 나가 버린 첫 책은 시시 때때로 내 얼굴을 홧홧하게 했다.

지극히 사적인 내면을 있는 그대로 노출시킨 것 같아 뒤늦게 당황스러웠다.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니 독자도 많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 차라리 다행스러웠다. 계약한 원고가 아니었으므로 판매에 특별한 품을 들일 일도 없었다.

‘저자’가 되었다는 감각은 내 인생 최초의 경험이었다. 보잘것없는 원고를 모아 예쁜 책으로 엮어주신 출판사 관계자님들께는 무한 감사가 샘솟았다.

두 번째 출간은 저자와 출판사 상호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진행한 작업이었다.

그쪽에서 원하는 콘센트가 있었고, 나는 주문받은 내용을 넉넉하게 반영한 글을 기한 내 생산해야 했다. 편집자와의 약속 날짜가 가까워지는 만큼 압박감이 밀려왔고, 거듭된 수정 요청 앞에서 맛보는 좌절감은 쓰디썼다. 인쇄 들어가기 직전까지 요소요소에 문구를 고심했고, 수정이 허용되는 마지막 시점까지 내 영혼은 오롯이 ‘출간’에 있었다.

첫 책과 마찬가지로 표지에 점자를 넣었다. 색감과 그림이 따뜻하다는 독자 반응이 반가웠다.

아담한 종이책을 만지며 나는 일련의 작업을 완주했음에 안도했다. 그러나 심장 떨리는 ‘처음잔치’는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북토크’ 말 그대로 책 얘기다. 저자로서 독자를 만나 책 이야기를 나누는 시공간, 상상만 해도 가슴 벅찼던 그 일이 현실로 다가왔다. 모든 처음을 사랑하는 나라서 설렜지만, 일정이 잡힌 순간부터 폭발한 긴장감은 이 몸을 집어삼킬 듯 강력했다.

노련한 솜씨로 행사를 진행해 준 프로 작가 친구 덕에 생애 첫 북토크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점자로 한 사인회에 비장애인 독자들은 어린아이처럼 흥미를 보였다. 직접 참석해 준 안내견 나라는 주인공 강산이 오빠 이상으로 독자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았다.

출판사 대표님은 지역 곳곳에 북토크 일정을 잡으며 마케팅에 주력하시는데, 한낱 무명작가의 에세이가 얼마나 팔릴 것인가.

기획 출판을 하고 보니, 원고는 내 손으로 썼어도 책 한 권이 완성되기까지 들어가는 공력은 저자 아닌 전문가들의 영역임을 면면이 배웠다. 그리하여 세상으로 나간 나의 두 번째 책은 결코 내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햇병아리 같이 무지한 저자 의견을 한껏 들어주시는 편집자님은 매의 눈이요, 토끼 귀의 소유자가 아닌가.

일단 오디오북 제작을 진행한 후 저시력인들을 위한 큰 글자책을 만들겠다 다짐하는 젊은 출판인의 행보, 내게는 여지없는 선물이다. 쓰고 읽는 사람들과의 인연은 언제나 아름다웠으므로.

교사 정체성으로 맺어진 동료들이 내 출간 소식에 놀라며 장난스럽게 말한다.

“오오, 작가님.”

비록 공인된 마감도 없고, 겨우 두 권 책을 출간한 저자지만, 내 안에 작은 창작 자아가 콩나물처럼 자라면 좋겠다. 가슴속에 응축되어 있는 슬프지만 찬란한 이야기 씨앗들이 무성하게 가지를 뻗고, 잎을 틔워 생생한 삶이 녹아 있는 작품으로 빚어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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